[한은형의 상·상·식·당] (12) 달이 둥글게 차오르면.. 달콤한 수박의 속살도 입에서 녹아

한은형 소설가 2014. 8. 28. 04: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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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 과일 이름을 제목으로 가진 소설을 쓰고 싶다고 생각한다. 야심이라면 야심이다. 이를테면 '워터멜론 슈가에서' 같은 제목이라야 할 것이다. 리처드 브라우티건이라는 미국 남자가 쓴, 실제로 팔리고 있는 소설이다. 이 소설을 잠시 소개하자면, 워터멜론 슈가(Watermelon sugar)에서 벌어지는 이야기다. 워터멜론은 수박인데, 그렇다면 워터멜론 슈가는 수박 설탕이란 말인가? 뭐, 수박 설탕에서 벌어지는 이야기라고? 수박 설탕이라는 괴상한 뜻을 지명으로 가진 동네가 있느냐고 물으시다면 곤란하다. 그냥 동네 이름이 워터멜론 슈가라고 하니 그런가 보다 하는 수밖에.

어쨌든 이 소설을 막무가내로 요약하자면 이렇다. 수박 향이 농후한 송어가 되려면 제대로 된 워터멜론 슈가에서 자라야 한단다. 워터멜론 슈가의 강에서 워터멜론 송어가 자라고 있는 것이다. 참고로, 이 리처드 브라우티건이라는 사람의 송어에 대한 애착은 유별나서 '워터멜론 슈가에서'를 쓰기 바로 전 해 '미국의 송어낚시'를 썼다.

수박을 먹으면서 워터멜론 슈가와 워터멜론 송어를 떠올렸던 것이다. 한국의 송어와 은어에 대해서도 생각했다. 그 물고기를 먹은 사람들은 짠 것처럼 '아, 수박 향이 난다'라고 했으니까. 이상한 일이다. 미국 사람들도 한국 사람들이 그러는 것처럼 송어에서 수박 향을 느낀다는 것이다. 중국 사람은 말할 것도 없고, 덴마크 사람과 부에노스아이레스 사람도 송어(혹은 은어)에서 수박 향을 느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수박과 송어에 관한 한 암묵적인 커넥션이 전 세계를 지배하는 데 성공한 건가? 전 세계인의 미뢰까지 지배할 수 있다니, 무시무시하면서도 심오한 커넥션인 것이다.

그렇다면 왜 수박을 먹으면서는 "어머, 은어 맛이야!"라거나 "송어 맛이 난다"라고 하지 않는지 궁금해졌다. 참고로, 요즘 내가 먹은 수박에서는 고수 맛이 난다. 고수를 넣었으니 당연하다. 고수를 좋아하시는 분이라면 꼭 이렇게 먹어보라고 강요하고 싶다. 아주 간단하다. 깍둑썰기한 수박을 접시에 늘어 넣고 소금을 솔솔 뿌린다. 그리고 고수를 적당하게 잘라서 뿌린다. 신기하게도 태국의 맛이 난다. 그렇더라도 수박의 속살을 베어 물고 싶은 날이 있다. 수박에 이를 박아 넣는 순간의 촉감 때문일까.

여름이 지나가고 있다. 수박도 지나가고 있다. 초조하다. 수박이 완전히 지나가면, 내가 일명 '수박 시(詩)'라고 부르는 시를 보며 수박을 먹는 나를 상상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대는 수박을 먹고 있었네 / 그대의 가지런한 이가 수박의 연한 속살을 파고들었네 / 마치 내 뺨의 한 부분이 그대의 이에 물린 듯하여 / 나는 잠시 눈을 감았네 / 밤은 얼마나 무르익어야 향기를 뿜어내는 것일까 / 어둠 속에서 잎사귀들 살랑거리는 소리 들으며 / 나는 잠자코 수박 씨앗을 발라내었네 / 입 속에서 수박의 살이 녹는 동안 달은 계속 둥글어지고 / 길 잃은 바람 한 줄기 그대와 나 사이를 헤매다녔네 / 그대는 수박을 먹고 있었네 / 그대가 베어문 자리가 아프도록 너무 아름다워 / 나는 잠시 먼 하늘만 바라보았네"(남진우, 달은 계속 둥글어지고)

전문을 인용할 수밖에 없었다. 수박의 속살과 달과 잎사귀와 밤과 바람과 속눈썹이 속살대고 있는 것이다. 입 안에서. 뺨 위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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