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자칼럼] 헨리8세의 브렉시트

입력 2016. 6. 23. 17:34 수정 2016. 6. 23. 2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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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춘호 논설위원 ohchoon@hankyung.com

헨리 8세(재위 1509~1547)는 원래 루터의 종교개혁에 반대할 만큼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다. 로마 교황으로부터 ‘신앙의 수호자’라는 칭호를 받기도 했다. 하지만 그는 첫 왕비인 아라곤의 캐서린과 이혼하고 앤 불린과의 결혼을 시도하면서 교황청으로부터 파문을 당한다. 헨리 8세는 교황청과 결별하고 독자적인 길을 걷는다. 500년 전 있었던 헨리 8세의 브렉시트다.

물론 당시에도 브렉시트를 놓고 지금과 못지않은 열띤 논쟁이 있었다. 교황청으로부터 독립하고 주권 국가를 회복해야 한다는 쪽에선 노골적으로 교황청과 신성로마제국에 대한 반감을 드러냈다. 당시 종교학자 폭스는 “영국은 여러 세기에 걸쳐 로마의 학정에 시달려왔으며 그런 학정은 로마 교황의 헛된 야욕에 권리를 강탈당했기 때문”이라고 분노했다. 그는 또 “이제 이런 교황의 탐심을 때려눕혀 정당한 질서를 회복해야만 한다”고 말했다. 영국 관료들은 영국도 제국(Empire)이라는 단어를 써야 한다면서 각종 법안에 제국을 써넣기도 했다. 당시 대륙을 지배하던 신성로마제국과 동등하다는 의지를 보여준 것이었다. 이들은 성직자도 국민에 속한다며 국왕과의 구분을 확실히 했다.

하지만 로마교황청에 잔류해야 한다는 쪽에선 “로마 가톨릭과의 관계를 끊을 경우 신과의 만남도 끝나고 모두가 영원히 지옥에 살게 될 것”이라고 위협했다. 재미있는 것은 당시 대륙과 무역이 활발하던 플랜더스 지역 상인들이 모두 독립에 반대했다는 사실이다. 이들은 주수출품이던 모직물 거래를 하지 못할까 두려워했다. 관련 법률들을 막기 위해 하원에 적극적으로 로비했다는 기록도 있다.

하지만 헨리 8세는 과감히 브렉시트를 이끌었다. 수장령을 반포하고 국교인 성공회를 만들며 가톨릭 수도원을 해산시켰다. 당시 영국에는 800개가 넘는 수도원이 있었고 이들이 갖고 있던 자산은 막대했다. 브렉시트 이후 영국 경제는 급격하게 변해갔다. 상인들은 유럽대륙보다 신대륙을 찾기 시작했다. 수도원 자산으로 생활 보조금을 받던 사람들은 도시로 진출했다. 수도 런던은 갈수록 커졌다. 도시화가 진척되고 중산층이 늘어났다. 교회와의 결별이 산업화를 이끈 것이다. 한 세기 뒤의 산업혁명을 낳는 결정적 전기가 헨리 8세의 결정 때문이라는 분석도 있다.

세기적 브렉시트 투표가 어제 있었다. 헨리 8세 이후 근 500년 만이다. 대상이 교황청 대신 EU로 바뀐 것 빼고는 그때와 비슷하다. 국론분열은 심각하다. 영국과 유럽에 어떤 변화가 올지 궁금하다.

오춘호 논설위원 ohchoon@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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