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을 읽다]조선 하늘·땅 아우른 '절친' 두 과학자

정종오 입력 2014. 8. 24. 13:04 수정 2014. 8. 24. 13: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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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강 최한기, 고산자 김정호의 '융합 과학'

[아시아경제 정종오 기자]조선의 하늘과 땅은 두 과학자에 의해 19세기 총정리 된다. 이들 두 사람은 어릴 때부터 서로 교류했다. 하늘과 땅에 대한 지식을 서로 공유하면서 지금의 '융합 과학'에 대한 그림을 그렸다.

19세기 초 황해도 토산.

서당을 다니는 두 학동이 만났다. 한 학동은 고산자(古山子) 김정호, 한 청년은 혜강(惠崗) 최한기였다. 두 학동은 신분의 차이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단 번에 서로를 알아봤다. 혜강이 고산자에게 먼저 이렇게 말한다.

"정호 너는 땅 끝에서 땅 끝까지, 땅의 지도를 그리고, 나는 하늘 끝에서 하늘 끝까지, 하늘의 지도를 그리는 거야. 그래서 합치면 우주만물의 지도가 되는 거지."

조선의 땅을 그린 지리학자와 조선의 하늘을 그린 천문학자가 절친인 '지음(知音)'으로 발전하는 순간이었다. 박범신 작가의 소설 '고산자'에 나오는 한 모습이다. 두 사람은 이후 실학사상을 기본으로 자신의 전문 분야를 발굴했고 그렇게 '하늘과 땅'을 아우르는 융합과학을 선보였다.

◆조선의 하늘 해석한 혜강=최한기를 두고 '조선에서 처음으로 공전을 주장하는 등 역학을 학습하고 재해석하는 모습을 보인 학자'라는 평가가 있다. 19세기 초 최한기의 기륜설(氣輪說)은 전형적 기의 메커니즘을 적용했다. 성리학적 인식을 중심으로 천체의 움직임 등 독특한 개념을 창출해 낸 과학자였다.

최한기의 기륜이란 기(氣)가 항성이나 행성을 겹겹이 에워싸고 있는 모습을 마치 수레바퀴에 비유해서 표현한 개념이었다. 최한기는 '기측체의'에서 독특한 시각의 사물 인식방법을 과학적으로 풀었다. 최한기는 "지지(地志)를 읽어 익숙하면 이해의 근원을 알고 지도(地圖)를 알면 멀리서도 밝게 통찰할 수 있고, 무엇을 할 것인가를 이해할 수 있다. 천하의 경륜은 지(志)와 도(圖)에 있으니, 경륜이 없는 사람은 지지를 담설(談說)하는 자료와 원근을 분별하는 표지로 삼을 뿐, 눈으로 보아도 마음에 미치지 못한다"고 썼다.

사고를 통해 추리해 만유의 진리를 파악하는 방법에 대해 서술한 '추측록(推測錄)'을 통해서도 최한기의 과학적 인식방법을 알 수 있다. 이런 자신의 노력과 중국에서 유입되던 당시 뉴턴 등을 해석한 관련 서적을 통해 19세기 초 조선에서도 천체를 이해하는 폭이 넓어졌다.

◆'넓은 지역 밝혀준' 고산자=고산자 김정호는 '대동여지전도' 서문에서 이렇게 강조했다.

"'선명(鮮明)하다'는 것은 '해 뜨는 동쪽(日)에서 달 지는 서쪽(月)까지의 넓은 지역을 밝혀주어(明) 사람을 새롭게 한다(鮮)'는 뜻으로 볼 수 있고 '땅이 동쪽에 있어 해를 가장 먼저 밝힌다'는 뜻도 있다. 그래서 조선(朝鮮)이라 한다."

대동여지도는 조선에서 가장 큰 지도였으며 분첩절첩으로 만들어져 가지고 다니기 아주 편리했다. 전국을 120리 간격, 22층으로 구분해 하나의 층을 1첩으로 만들고 총 22첩의 지도를 상하로 연결해 만든 지리과학의 집대성이다. 분첩절첩으로 제작돼 휴대하고 보관하기 편리한 것은 물론 일부분만 필요한 경우 그 부분만 뽑아서 가지고 다닐 수 있도록 했다. 조선의 산하를 직접 걸어 다니며 대동여지도를 만든 김정호. 김정호 개인의 능력이 표출된 작품이었는데 15세기부터 내려온 조선의 국토정보가 많은 도움이 됐다.

양보경 성신여대 지리학과 교수는 "김정호는 관청에 소장돼 있던 여러 지도를 두루 열람했고 그동안 비변사나 규장각에서 만든 지도를 참고로 대동여지도라는 대 작품을 만들 수 있었다"고 지적했다.

◆조선의 과학은 이어졌다=조선의 과학은 15세기 세종시대 때 최고의 꽃을 피웠다는 사실을 부인하는 학자는 없다. 장영실 등 뛰어난 인재는 물론 자격루, 혼천의 등 천문, 지리, 의학에 이르기까지 많은 과학적 발명이 이어졌고 수많은 관련 서적이 편찬됐다.

반면 이후 세종조 때의 과학적 성과가 후세대로 이어졌느냐는 부분에 이르면 학자 사이에 논란이 있다. 이어지지 못하고 개화기 때 서구과학이 밀려들면서 일방적으로 우리나라가 받아들였다는 주장이 있다. 세종시대의 과학적 발전이 후세대로 이어지지 못했고 개화기 때 서구과학이 밀려들어오면서 현재의 모습을 갖췄다는 인식이 앞섰다.

이에 대해 23일 '문화의 안과 밖' 강연자로 나선 문중양 서울대 국사학과 교수는 "성리학적 세계를 중심으로 독특한 해석하는 조선의 과학은 중단되지 않고 줄곧 이어져 왔다"고 주장했다. 문 교수는 '동양과 한국의 과학 전통-조선에서의 이질적 동서양 두 과학의 만남'이라는 주제로 강연하면서 "15세기 조선의 의학을 총 집대성한 '향약집성방' '의방유취' 등의 성과는 1610년에 완성을 본 허준의 '동의보감'으로 이어졌다"며 "15세기 조선의 과학적 발전은 후세대에 영향을 미쳤고 김정호, 최한기 등 수많은 조선의 과학자들에게 큰 자양분이 됐다"고 말했다.

조선의 역사, 과학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지나친 국수주의도, 지나친 사대주의도 필요치 않는 곳이 역사이다. 15세기 찬란했던 세종시대의 과학은 허준은 물론 19세기 혜강과 고산자를 통해 이어졌고 지금 우리에게 전해지고 있다. 그 사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조선 과학을 이해하는 폭을 넓힐 수 있는 하나의 길이라고 문 교수는 강조했다.

정종오 기자 ikokid@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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