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윤종의 쫄깃 클래식感]랴도프가 속필가였다면.. '스트라빈스키의 불새' 없었을것
[동아일보]
어디든 일을 쉽게 빨리 하는 사람과 마냥 질질 끄는 사람이 있습니다. 물론 작업 속도와 결과물의 품질은 별개 문제죠. 일을 빨리 하면서도 잘하면 가장 좋겠습니다만….
음악사상의 '속필가'로는 흔히 모차르트와 로시니를 꼽습니다. 반면 마냥 여유를 부린 스타일로는 푸치니를 들곤 하죠. 이런저런 핑계를 대며 작업을 미루다가 '이런 대본으로는 작곡 못하겠어'라며 남 탓을 하는 탓에 악보출판업자 겸 공연기획자였던 줄리오 리코르디가 애를 먹었다고 합니다.
작곡가의 느린 작업이 음악사의 방향을 바꾼 일도 있습니다. 1908년, '러시아 발레단' 대표로 당대의 명흥행사였던 세르게이 댜길레프는 러시아 민화를 소재로 한 발레 '불새' 작곡을 작곡가 아나톨리 랴도프(1855∼1914·사진)에게 의뢰해 놓고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랴도프가 워낙 작업을 질질 끄는 스타일이라 조바심을 내고 있었죠. 그러던 차에 우연히 26세의 젊은 작곡가 이고리 스트라빈스키가 작곡한 '불꽃'을 듣고 한순간에 매료되었습니다.
댜길레프는 바로 계획을 바꿔 '불새'의 작곡을 스트라빈스키에게 맡겼습니다. 당시 랴도프에게 공식적으로 작곡 의뢰를 한 단계는 아니었다는 반론도 있지만, 스트라빈스키가 없었다면 작업은 랴도프에게 돌아갔을 것입니다.
만약 랴도프가 속필가였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스트라빈스키는 출세작이자 그의 '3대 발레' 첫 작품인 '불새' 작곡 기회를 얻지 못했을 것이고, '페트루슈카' '봄의 제전'으로 이어지는 후속 작업도 오늘날 우리가 보는 것과 같지 않았을 것입니다. 물론 타고난 재능으로 어떻게든 후세에 이름을 알렸겠지만, 그 위상은 오늘날 아는 것과 달랐을 수 있습니다.
재미있는 것은, 스트라빈스키가 랴도프의 느리면서 꼼꼼한 작업 스타일을 높게 평가했다는 것입니다. 그는 랴도프가 '엄청난 정확성과 세부에 대한 섬세함'을 갖고 있었다고 회상했습니다.
이달 28일은 랴도프의 서거 100주년 기념일이지만 고향인 러시아 밖에서는 그가 생전 남겼던 성과에 그다지 주목하지 않는 듯합니다. 랴도프의 '기억할 만한 느긋함'을 회상해 보자는 뜻에서 한 번 적어보았습니다.
유윤종 gustav@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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