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윤종의 쫄깃 클래식感]이국의 팜 파탈은 '반음계'를 좋아해

2015. 9. 1. 0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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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일보]
오페라 ‘삼손과 델릴라’
피아노의 흰 건반을 차례로 쳐봅니다. 도-시-라-솔-파-미-레-도. 아무 리듬이나 붙여도 제법 ‘노래’ 같습니다. 이번에는 검은 건반까지 다 쳐봅니다. 우리가 흔히 부르는 노래 가락 같지는 않습니다. 물컵에 물 따르는 소리 같다고 할까요.

10일 서울 예술의전당 콘서트홀에서 열리는 ‘한화생명과 함께하는 11시 콘서트’에서는 메조소프라노 추희명이 최승한 지휘 코리안심포니오케스트라 협연으로 모차르트와 생상스 등의 오페라 아리아를 노래합니다. 제가 주목한 노래는 생상스 오페라 ‘삼손과 델릴라’ 중 ‘그대 음성에 내 마음 열리고’, 그리고 비제 오페라 ‘카르멘’ 중 ‘하바네라’였습니다.

두 노래에는 몇 가지 공통점이 있습니다. 프랑스 작곡가가 쓴 오페라 아리아라는 점, 두 노래를 부르는 배역이 모두 남자를 꾀어 몰락시키는 이른바 ‘팜 파탈(femme fatale)’이라는 점, 그리고 두 노래 모두 반음씩 아래로 내려가는 ‘반음계(半音階)적 하행(下行)음형’이 있다는 점입니다.

두 작곡가가 활동한 낭만주의 시대에 반음계가 계속 이어지는 선율은 널리 쓰이지 않았습니다. 전 세계의 민속음악에서도 반음계 선율은 잘 쓰이지 않습니다. 왜 두 작곡가는 반음씩 내려가는 선율을 썼을까요. 혹 두 여주인공이 팜 파탈이라는 점과 관련이 있는 것은 아닐까요.

‘삼손과 델릴라’에서는 남녀가 한 방에 있을 때 여주인공이 남주인공을 유혹하는 장면이고, ‘카르멘’에서는 거리에서 집시 여자가 남자의 시선을 끌어보려 시도하는 장면입니다. ‘삼손과 델릴라’의 델릴라는 구약성경 속 이스라엘인인 삼손을 유혹하는 이교도 블레셋 여성이고, ‘카르멘’의 타이틀 롤은 스페인의 집시입니다. ‘유혹’과 ‘이국적’이라는 점에서도 두 작품은 공통된 코드를 갖고 있습니다.

이제 피아노 앞에 다시 앉아 ‘도’부터 건반을 따라 반음씩 내려가며 쳐봅니다. 친숙하다기보다는 이국적인 느낌, 그리고 솔직하다기보다는 마음을 숨기는 듯하면서 고혹적인 느낌이 듭니다. 누구도 작곡 교본에 쓰지 않았지만 무의식 속에 공유하게 되는 느낌. 바로 관습의 힘이자 전통의 힘이 아닐 수 없습니다.

유윤종 gustav@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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