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희윤 기자의 싱글노트]낯선 도시 평양, 칠흑의 외로운 밤

2015. 4. 27. 03: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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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4월 26일 일요일 맑음. 평양의 밤.
#155 Blur 'Pyongyang'(2015년)

[동아일보]

몇 년 전 처음 만난 영국의 밤은 파랬다. "어학연수 왔다 진짜 우울증 걸려 돌아간 애들 많다"는 말이 예사소리로 안 들렸다. TV를 틀었다. 내일의 날씨는 '맑음/비'였다. 예보 화면 속 런던 위에 해와 우산이 나란히…. "여긴 저 예보가 다반사"란 A의 설명이 잘 이해 안 됐다.

다음 날 낮, 시내에서 난 실제로 '맑음/비'를 만났다. 해맑던 하늘이 불현듯 빗방울을 투두둑 떨구자 길을 걷던 신사숙녀들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근처 빌딩으로 몸을 피했다. 여왕의 나라에 계절의 여왕은 거의 안 사는 듯했다.

영국 런던 출신 4인조 록 밴드 블러의 음악은 돌아보니 '맑음/비'였다. 이를테면 '걸스 앤드 보이스' '커피 앤드 티비'는 통통 튀는 리듬처럼 신나지 않는다. 흥 좀 날 만하면 모호한 음표나 화성을 끼워 넣어 비와 맑음의 경계를 흐려버리는 이들의 장기. 치킨 속살처럼 부드러운 노래 '텐더'마저 열대의 상여 소리 같다. 블러란 팀명 자체가 희미한 것, 모호한 것을 뜻하잖나.

블러가 무려 12년 만의 신작 '더 매직 윕(The Magic Whip)'(사진)을 27일 세계 동시 발매한다. 동양적 색채가 가득하다. 대부분의 곡을 홍콩의 스튜디오에서 만들어서 그런가 보다. 음반 표지에 한자만 있다. 그룹 모호(模糊)의 '마편(魔鞭)' 앨범. '론섬 스트리트'(QR코드) 뮤직비디오엔 중국 생활무용 협회원들이 무더기로 등장해 춤춘다.

신작엔 명백한 비의 노래가 많다. 빠르게 스치는 네온사인처럼 흐물대는 '아이스크림 맨' '고스트 십' '마이 테라코타 하트' '소트 아이 워즈 어 스페이스맨'의 눅눅한 전자음들…. 열두 곡 가운데 대번에 눈에 띄는 건 '평양'이다. 리더 데이먼 알반이 얼마 전 북한을 다녀왔다고 했다.

'묘는 허물어지고/완벽한 도로는/당신 없인 텅 비어 보일 것이다/그리고 위대한 지도자들을 휩싼 분홍빛 조명은/사라져간다/당신의 태양이 거기서 뜰 때쯤이면/여기는 파리해진다/은빛 로켓들이 오고/평양의 벚나무들/난 떠날 거다.'

비 오는 월요일의 데이비드 보위처럼 알반은 노래한다. 취한 듯 흔들리는 기타와 전자음, 우울한 시어 사이로 그가 정확히 발음하는 두 글자. 낯선 도시, 칠흑의 외로운 밤이 그에겐 '맑음/비'보다 낯설었을까. '…이제 곧 빛은 사라질 것이다/유리로 된 관의 붉은 불빛만을/누군가 밤새 지키리라.' (근데 이 매력적인 밤 노래, 이 엄혹한 시대에 이적표현물로 분류되는 건… 아니겠지.)

임희윤 기자 im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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