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소문 포럼] 약자 순서로 자르는 야만적인 구조조정

정철근 2016. 5. 5. 0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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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업 하청노동자 2만 명 해고 위기노사, 임금 삭감 통해 일자리 나눠야
정철근 중앙SUNDAY 사회에디터

“야-, 여기 집보다 넓고 좋다.” 다섯 살짜리 건우와 한 살 아래 동생 선우는 아빠 사진이 걸린 영안실이 놀이터인 줄 안다. 5월 5일 눈부시게 화창했던 어린이날, 조선소 하청업체의 노동자인 아빠는 이날도 일터로 향했다. 휴일수당 6만원을 벌기 위해 아이들의 얼굴을 가슴에 묻은 채 고단한 발걸음을 재촉했다. “퇴근하면 맛난 거 사줄끄마.” 아이들에게 다짐했던 아빠는 영원히 약속을 못 지키는 몹쓸 아빠가 되고 말았다. 산재(産災)의 올가미는 건우와 선우에게서 아빠를 빼앗아갔다. “어린이날이 지 애비 제삿날이 됐습니더.” 아빠와 같은 조선소에서 역시 하청노동자로 일하는 할아버지는 철없이 뛰노는 손자들을 보며 목이 멘다. 대학 다니던 아들이 조선소에서 일한다고 할 때 왜 뜯어말리지 못했을까. “할배 할배, 아빠한테 전화해봐-” 건우와 선우는 아직도 아빠가 집에 돌아오는 줄 안다.

위 글은 2004년 5월 5일 산재로 숨진 경남 진해 STX조선소의 하청업체 근로자 김외진(당시 29세)씨의 이야기다. 김씨는 어린이날 출근해 일하다 무게 1.3t의 철판에 깔려 사망했다. 노조 측은 “원래 2인 1조로 작업해야 하는데 휴일에 사람이 없어 김씨 혼자 일하다 사고를 당했다”고 말했다. 그때 노동부에 출입했던 나는 뉴스를 수필 형식으로 풀어 쓰는 ‘생각 뉴스’에 이 슬픈 사연을 실었다. 매년 어린이날이면 나는 건우 아빠의 비극이 떠오른다.

한국 조선산업은 2003년 세계 1위에 올랐다. 대주주는 매년 거액 배당을 챙겼고 정규직 노조는 임금을 올렸다. 그러나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격차가 커졌고, 하청업체 단가 후려치기는 심해졌다. 건우 아빠가 죽은 지 딱 12년이 흘렀다. 최소한의 정의가 있다면 하청노동자들은 예전보다 대우가 나아져야 마땅하다. 하지만 올 들어 현대중공업에서만 산재로 하청노동자 3명이 숨졌다. 그동안 조선업계의 호황에도 비정규 노동자들은 별 ‘낙수효과’를 누리지 못했다. 힘들고 위험한 일을 맡지만 임금은 정규직에 훨씬 못 미친다. 그나마 이제는 생존을 걱정해야 하는 처지다. 조선업계에선 올해 2만 명의 하청노동자가 일자리를 잃을 전망이다. 노동절인 지난 1일 울산을 찾았다. 노사 모두 구조조정을 앞두고 분위기가 살벌했다. 김기봉 전 석유공사 초대 노조위원장은 “1987년 노동자 대투쟁 이후 최대의 변혁기”라고 울산의 분위기를 전했다. 반면 현대중공업 공장 옆의 일산해수욕장은 평화로웠다. 따뜻한 봄 바다를 즐기는 시민들의 표정에서 곧 구조조정의 칼바람이 닥칠 것이라는 위기감은 찾아보기 힘들었다. 다만 해변에 늘어선 ‘임대, 권리금 없음’이라고 써 붙인 빈 가게들이 울산의 불황을 상징하고 있었다. 현대중공업에서만 20년 넘게 하청을 받고 있다는 한 협력업체 사장과 통화를 했다. 속상해서 낮술을 마셨다는 그는 절망감을 토로했다. “하청업체는 미래가 안 보입니다. 우리 회사도 아이들이 있는 40~50대 직원 위주로 놔두고 미혼의 젊은 직원들은 내보내고 있습니다.”

현대중공업 노동자들 사이에는 ‘정리해고 기준’이 떠돌고 있다. 1순위 파견·계약직, 2순위 고졸 정규직 여사원, 3순위 직책 없는 과장급 이상 사무직, 4순위 직책 없는 차장급 이상 생산직의 순이다. 노조의 보호를 받는 정규 생산직은 빠져 있다. 이대로 가면 철저하게 약자 위주로 칼을 대는 야만적인 구조조정이 벌어질 게 뻔하다. 현대중공업 노조는 올해 6.3%의 임금 인상을 요구하고 나섰다. 기선 제압용으로 해석하더라도 약자의 현실을 외면한 이기적인 행태다. 노조가 인력 감축을 최소화하길 원한다면 임금 삭감을 통한 일자리 나누기부터 제안해야 한다. 그러면서 대주주와 경영진의 책임 분담을 요구해야 설득력이 있다.

허허벌판 울산 방어진 바닷가에 세계 최고의 조선소를 세운 기적은 고 정주영 회장 혼자 만든 것이 아니다. 한여름에도 입에 얼음을 물고 용접불꽃과 싸운 노동자들이 함께 이룬 성공이다. 노동자들도 신화의 주역인 만큼 책임의식을 가져야 한다는 뜻이다. 생산의 절반 이상을 담당하는 하청노동자들이 사라지면 옛 영화를 다시 찾기 어려울 것이다. 하청노동자들을 다 내쫓아 놓고 방어진 조선소의 텅 빈 도크에 예전에 많았다던 방어(?魚)나 양식할 셈인가.

정철근 중앙SUNDAY 사회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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