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왕설래] 금속활자

입력 2015. 12. 1. 22:15 수정 2015. 12. 1. 2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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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종 때에 와서 비로소 평장사 최윤의 등 17명의 신하에게 명해 고금의 서로 다른 예문(禮文)을 모아 참작하고 절충해 50권의 책을 만들고 그것을 ‘상정예문’이라고 명명했다. … 결국 주자(鑄字)를 사용해 28본을 인쇄하고 여러 기관에 보내 간수하게 하니….”

고려 문신 이규보가 쓴 ‘동국이상국집’이 전하는 ‘상정고금예문’ 금속활자 인쇄 기록이다. 학자들은 1234년의 일로 추정한다. 하지만 인쇄된 책은 전하지 않는다. 1972년 역사학자 박병선이 프랑스 파리 국립도서관에서 1377년 간행된 ‘직지심체요절’을 찾아내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금속활자 인쇄물로 인정받자 고려 금속활자에 반신반의하던 국내 학계가 반색했다. 금속활자 연구가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

고인쇄술 연구의 대가인 고고학자 손보기는 “우리 민족이 세계 인류 문화에 이바지한 것 중에서 가장 으뜸으로 손꼽힐 것이 곧 금속활자의 발명”이라며 “금속활자 인쇄의 근본이 되는 기술은 우리나라에서 비롯됐다”고 했다. 고려의 금속활자 기술이 원나라로 흘러들어갔다가 아라비아인들에게 전해져 카드놀이를 위한 카드 인쇄에 쓰인 뒤 다시 유럽으로 넘어가 구텐베르크 등의 활자인쇄 기술에 이바지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나라 금속활자는 근대 인쇄술의 발전으로 이어지지 못했다. 한자 서적을 금속활자로 인쇄하려면 한 번에 10만자 넘게 주조해야 했기에 엄청난 제작비가 들지만, 소수 지배층만을 위한 책이어서 수요가 적었다. 조선시대에 세종대왕이 한자를 모르는 백성을 위해 한글을 만들고 금속활자를 개량했으나 그 후엔 누구도 둘을 결합시켜 한글 책을 찍어낼 생각을 하지 않았다. 인쇄 문화나 인쇄술이 더 이상 발전하지 못한 이유다. 조선 후기 들어 민간에서 책을 인쇄해 팔기 시작했지만 개항기에 서양 인쇄기가 들어오자 기존 활자는 수명을 다했다.

고려시대 왕궁터인 개성 만월대에서 남북 공동 발굴조사단이 고려 금속활자 1점을 찾아냈다. 고려 왕궁이 홍건적의 침입으로 소실된 게 1361년이니 ‘직지심체요절’보다 앞선 것으로 추정된다. 학계는 앞서 고려 금속활자로 확인된 2점에 비해 서체가 세련되고 주조가 정교해 귀족문화 절정기인 12∼13세기 것으로 본다. 활자의 의미를 되새기게 된다. 지식을 많은 사람들에게 전하는 것이 활자의 존재 이유다.

박완규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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