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왕설래] 동원(動員)의 기억

입력 2015. 11. 30. 2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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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 일행을 태운 보잉707 특별기가 환영식장 쪽으로 다가오는 사이 경기여고 합창단 1000여명은 ‘대통령 찬가’를 합창했다. 공항 환영식이 끝난 후 대통령 전용차가 서울대교를 지나 마포로로 접어들자 마포고교 밴드부가 연주하는 행진곡이 울려퍼지는 가운데 도로를 가득 메운 시민·학생들은 태극기와 성조기를 흔들며 환호했다.”

1981년 2월 미국 공식방문을 마치고 귀국한 전두환 대통령 내외 환영식 기사의 일부다. 영화 ‘살인의 추억’에도 비슷한 장면이 등장한다. 똑같은 한복 차림의 여고생들이 종이 태극기를 들고 도로변에 서 있다가 빗방울이 떨어지자 우르르 가게로 뛰어간다. 70, 80년대 학창시절을 보낸 이들은 이런 유의 추억을 하나쯤 가지고 있다. 대통령 행사나 무슨 궐기대회 때마다 수업을 빼먹고 동원돼 거리를, 광장을 헤맸던 기억들.

흑백사진처럼 남았던 기억을 새삼 끄집어낸 건 한 편의 동영상 때문이다. 하얀 치마 위에 잔뜩 움켜쥔 주먹, 새빨개진 코와 꼭 다문 입술, 검은 구두 속의 발가락을 꼼지락거리며 덜덜 떨던 아이들. 지난 26일 국회에서 열린 고 김영삼 전 대통령 영결식에 참석한 구리시립소년소녀합창단 단원들이다. 2시간 정도 진행된 이날 행사 끄트머리에 잡힌 추모곡 ‘청산에 살리라’를 부르기 위해 기다리던 모습이다. 눈발이 날리는 한파에 목도리, 외투, 담요로 중무장한 귀빈들과는 대조적이었다. ‘인솔자와 학부모가 점퍼와 담요를 요청했는데 카메라에 잡히면 안 된다는 이유로 거절당했고, 아이들이 행사가 끝난 뒤 몸이 굳어 잘 걷지도 못한 상태로 눈물까지 흘렸다’는 트위터 글은 1600회 이상 리트윗됐다.

주최 측의 몰지각한 행태에 네티즌 성토가 이어지자 사실상 상주 역할을 한 김 전 대통령 차남 현철씨가 27일 트위터를 통해 공개 사과했다. 정작 국가장 영결식 진행을 맡았던 행정자치부 측은 28일에야 김혜영 의정관 이름으로 SNS에 사과의 글을 남겼다. 장례 집행위원장인 정종섭 행자부 장관은 아무 말이 없다. 그의 공식 페이스북엔 대구 행사 사진 2장이 올라와 있다. 대구 출마설이 자자한 그는 이틀간 이 행사에 참석한 뒤 영결식 전날에야 귀경했다. 이번 동영상 파문은 ‘마음이 콩밭에 가 있는’ 장관, 세월이 흘러도 변치 않는 공무원 집단의 권위주의가 빚은 합작품이다.

황정미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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