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 읽기] 도덕에 호소하기 어려운 시대 / 김현경

2016. 8. 24. 17: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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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김현경
문화인류학자

우리는 윤리적인 결정이 어느 때보다 사적인 문제가 되어버린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가령 당신이 종이컵을 쓰지 않기 위해 텀블러를 가지고 다니기로 했다고 하자. 사람들은 아마 ‘개념 있는 행동’이라고 당신을 칭찬할 것이다. 하지만 칭찬한다는 것이 그들도 당신처럼 하겠다는 뜻은 아니다. 당신에게 종이컵을 쓰는 사람들을 비판할 권리가 생겼다는 뜻은 더더욱 아니다. 오히려 당신은 텀블러를 가지고 다니는 행동이 종이컵을 사용하는 사람들에 대한 어떤 비난도 포함하고 있지 않음을 적극적으로 암시해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지나친 진지함으로 주위 사람을 피곤하게 만드는 사람, 혼자 양심적인 척하는 사람으로 낙인찍힐 우려가 있다.

이런 종류의 낙인은 여러 가지 형태로 나타난다. 그중 하나는 ‘힙스터’라는 낙인이다. 힙스터의 어원이나 존재양식에서 대해서는 인터넷을 찾아보기 바란다. 나는 이 단어를 ‘스타일로서의 진보’를 추구하는 사람이라는 의미로 이해한다(구체적으로 떠오르는 이미지는 자전거를 타고 길고양이를 돌보고 인디음악을 듣는 사람이다). 물론 여기에는 빈정거림이 깃들어 있다. 정말 세상을 바꾸려는 게 아니라, 그냥 자기를 바꿔보고 싶어 하는 사람이라는. 윤리적인 결정은 이렇게 해서 라이프스타일의 영역으로, 다시 말해 취향의 영역으로 소환된다. 가방에 세월호 리본을 붙이든, 페이스북에 시리아 어린이의 사진을 올리든, 그건 당신의 자유다. 누구나 원하는 아이콘으로 자아를 장식할 권리가 있으니까.

하지만 도덕적 불간섭주의가 이처럼 대세가 되었다는 것이 우리가 더 자유롭고 차이를 존중하는 사회에서 살아가게 되었다는 뜻은 아니다. 공공장소에서 적절하지 못한 행동을 한 사람에게 퍼부어지는 엄청난 비난을 생각해보면 금방 알 수 있다. 오늘날 윤리의 자리를 대신 차지하고 있는 것은 매너의 관념이다. 의미심장하게도 매너에서 벗어나는 행동(‘비매너’)에 대한 평가는 도덕적 판단을 나타내는 단어(옳다, 그르다)가 아니라, 취향을 표현하는 단어(혐오, ‘극혐’)로 이루어진다.

누군가는 말할 것이다. 가치의 다원성을 전제하는 현대 사회에서 이것은 당연한 현상이라고. 현대 사회는 법을 통해 개인의 행동을 규제할 뿐, 개인의 가치관에 대해서는 이러쿵저러쿵하지 않는다. 우리는 법을 어기지 않는 한, 우리 행동에 대해 간섭받지 않을 권리가 있다. 설교를 늘어놓는 것은 결코 ‘매너’가 아니다. 사실 현대 사회에서 우리가 (제 자식이 아닌 다음에야) 타인의 행동에 간섭할 수 있는 것은 옆 사람의 벌린 다리가 내 다리에 닿을 때처럼, 나의 자유가 너의 자유와 직접 마찰을 일으키는 경우뿐이다.

게다가 무엇이 되었든, 도덕에 호소하는 것보다는 법으로 규제하는 것이 더 공정하고 간단한 방법이다. ‘양심적으로’ 일회용품을 쓰지 말고 ‘양심적으로’ 작은 차를 타라고 말하는 것보다는 일회용품이나 큰 차에 높은 세금을 물리는 것이 훨씬 낫다.

그러나 이런 생각에는 허점이 있다. 법을 만드는 것은 바로 우리다(요즘 웬만한 법은 대기업 법무팀이 다 만든다고 하지만). 어떤 행동을 법으로 규제하려면, 그전에 무엇이 옳은지에 대해 공적인 토론과 합의가 있어야 한다. 더구나 종이컵 사용을 규제하는 것 같은, ‘기업 활동의 자유’와 충돌하는 법의 경우, 그런 법이 필요하다는 아주 강력한 여론이 있어야 하는데, 그런 여론은 어떤 ‘도덕적인’ 운동 바깥에서 저절로 생겨나기 어렵다.

무섭도록 더운 여름이다. ‘공동체’는 나에게는 너무 ‘더운’ 단어이지만, 여름이 더 더워지는 것을 막으려면 역시 이 단어가 필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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