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 읽기] 최저임금, 생존이 아니라 존엄이다 / 정정훈

2015. 6. 30. 1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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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헌법은 "근로조건의 기준은 인간의 존엄성을 보장하도록 법률로 정한다"(제32조 제3항)고 규정하고 있다. 1980년 8차 개정 헌법에서 "인간의 존엄성을 보장하도록" 하는 내용이 추가된 것이다. 그 개정 과정이 어찌되었든지 간에 1980년 헌법 개정 이후, 국회의원들은 근로관계법을 제정·개정하면서 법률의 내용이 "인간의 존엄성을 보장"하도록 해야 할 헌법적 의무를 부담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이 헌법 규정을 볼 때마다 의심이 든다. 과연 그동안 헌법에서 정한 "인간의 존엄성을 보장"하는 근로조건에 대하여 숙고하고, 이를 구체화하는 기준을 제시하기 위한 어떤 노력이 있었는지? 수많은 국회의원들 중에 이를 법률로 실현하려는 의지를 가졌던 정치인들은 얼마나 되는 것인지?

"인간의 존엄성을 보장"하는 근로조건과 관련하여 중요한 문제 중 하나가 최저임금이다. 최저임금도 근로조건의 기준에 해당하므로, "인간의 존엄성을 보장"할 수 있도록 그 내용이 정해져야 한다. 헌법은 근로조건과 관련하여 '생존'이 아니라 '존엄'을 규정하고 있는 것이다.

'최저임금법'은 '임금의 최저수준을 보장하여 근로자의 생활안정'을 꾀하겠다는 목적을 제시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목적에 대한 해석은 입장에 따라 사뭇 다르다. 사용자 단체는 '최저임금은 단신 노동자 생계비' 보장을 목적으로 한다고 주장한다. 최저임금위원회도 1988년 '최저임금법'이 시행된 이래 '미혼 단신 근로자 생계비'를 참고하여 최저임금을 산정해 왔다. 반면에 노동자 측은 "최저임금의 결정은 빈곤을 극복하고 모든 노동자와 그 가족의 요구를 충족시킬 것을 목적으로 수립된 사회보장 정책의 한 부분"이라는 국제노동기구(ILO)의 권고에 근거하여 노동자뿐만 아니라 그 가족 구성원의 최소한의 생활을 보장할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처럼 기본적 시각 차이가 좁혀지지 않는 것이 최저임금 결정을 사회적 합의 과정이 아니라 흥정의 대상으로 전락시킨 이유 중 하나다. 노동계, 사용자, 공익위원 대표로 이뤄진 최저임금위원회에서는 매년 물건값 흥정하듯 최저임금을 결정해왔다. 동결을 주장하는 사용자 측과 큰 폭의 인상을 요구하는 노동자 측의 요구가 대립되다가 결국은 공익위원 제출안으로 수렴되는 상황이 반복돼온 것이다.

최저임금 결정이 흥정의 대상으로 전락했다는 비판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아르바이트 청년 등 저임금 노동자들의 삶과 그 존엄성 자체가 흥정의 대상이 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정치는 이 문제에 적극적으로 개입하지 않았다. 최저임금 제도의 취지와 그 수준에 대한 사회적 합의가 이루어지지 않은 상황을 정치권이 방관한 것이다. 최소한의 인간의 존엄성을 보장하도록 제도를 만들 책임이 있는 정치권이 오랜 기간 직무를 유기해온 것이다.

매년 형식적으로 몇백원을 인상할 것인지에 대한 논의가 아니라, 최저임금법으로 노동자 한 개체의 최저 '생존'만을 보호할 것인지, 아니면 최소한의 '존엄'한 삶을 보장할 것인지, 이 문제가 정치가 다루고 대답해야 할 문제다. "정말 중요한 복지의 원칙은, 일하는 사람이 가난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열심히 일해도 돌아오는 것이 가난밖에 없다면 그 사회는 꿈을 잃어버린 사회입니다." 2012년 당시 박근혜 새누리당 대통령 후보의 방송연설 중 일부다. 이미 답은 나와 있다. 최저임금은 한 개체의 '생존'이 아니라 '존엄'에 기초해야 한다. 최소한의 존엄을 보장하기 위한 최저임금의 원칙과 그 최저선을 제도로 규정해야 한다. 정치인들은 잠자고 있는 최저임금 관련 법안들을 깨우고, 지금 당장 제도화를 위한 구체적인 노력을 시작해야 한다.

정정훈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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