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네마노믹스] 에이즈 환자 3500만명 넘는데..치료제는 왜 여전히 비쌀까

이현진 2014. 9. 22. 17: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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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라스 바이어스 클럽'으로 본 희귀병의 경제학 에이즈 환자 80%가 경제적 구매능력 떨어지는 아프리카·동남아인 다양한 치료제 안 나오고 나와도 수요 적어

[ 이현진 기자 ]

"그러니까… 에이즈 양성반응입니다. 앞으로 30일 정도 남았습니다." 의사의 말에 남자는 피식 웃는다. "내가 게이(동성애자)라고요? 다른 사람과 착각했을 거요." 로데오 경기와 마약을 즐기고, 하루가 멀다하고 여자를 바꾸는 '마초 중의 마초'인 자신이 동성애자나 걸리는 에이즈에 감염됐을 리 없다는 반응이다.

현실을 부정해보지만 하루가 다르게 나빠지는 몸. 비관하던 남자는 임상시험 중인 에이즈 치료제 지도부딘(AZT)을 빼돌려 복용하지만 오히려 증세는 더 나빠진다. 그러던 중 미국 식품의약국(FDA) 승인을 받지 못해 멕시코를 통해 불법으로 들어온 잘시타빈(ddC)과 펩타이드T로 큰 효과를 본다. 이걸 미국에서 팔면 어떨까. 이 약들을 밀수한 주인공은 클럽을 만들어 회비를 낸 환자들에게 팔기 시작한다. FDA가 허가하지 않은 에이즈 치료제의 공급처. 바로 '달라스 바이어스 클럽'이다.

에이즈의 경제학

실화를 바탕으로 한 이 영화의 배경은 1985년 미국 텍사스 댈러스. 전기기술자 론 우드로프(매슈 매코너헤이 분)가 에이즈 발병 진단을 받는 것으로 시작된다. 에이즈는 HIV(Human Immunodeficiency Virus)로 전염되는 병으로, 원래 아프리카 일부 지역에서 생기는 풍토병이었다. 주로 환자의 혈액이 상처나 수혈로 다른 사람에게 옮겨가거나, 성관계로 체액이 섞이는 경우 또는 오염된 주사기 등을 함께 쓰면서 감염되는 것으로 알려졌다. 때문에 에이즈가 알려지기 시작한 1980년대 발병 환자 가운데는 동성애자나 론 같은 마약 중독자가 많았다.

일부 경제학자들은 에이즈 치료제가 쉽게 나오지 않는 이유를 여기서 찾았다. 사회·경제적으로 소수자였던 이들은 치료제가 나와도 비싼 약값을 낼 수 없었다. 유엔에이즈계획(UNAIDS)이 추산한 전 세계 에이즈 환자는 현재 약 3500만명이다. <그래프>를 보면 이들의 80%가량은 아프리카와 동남아시아 등 제3세계 국민이다. 수요층의 구매력이 뒷받침되지 않는 치료제 개발은 수지타산이 맞지 않는 사업인 것이다.

환자들의 낮은 구매력은 기존 치료제 가격까지 높게 책정하는 이유가 됐다. 어차피 사 먹을 사람이 많지 않다면 제약사로선 살 수 있는 사람을 대상으로 약값을 아주 비싸게 책정하는 수밖에 없다. 결국 질병 자체의 심각성뿐 아니라 그 질병을 앓는 이들의 사회적·경제적 위치가 치료제 연구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다는 주장이다.

실제 희귀병은 말 그대로 환자들이 '희귀'하기 때문에 신약 개발이 이뤄지지 않는 경우가 많다. 제약사가 많은 비용을 들여 약을 개발해도 사줄 사람이 많지 않으면 손실을 볼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FDA는 필요없어!"

FDA의 승인을 받은 AZT를 복용한 뒤 부작용을 경험한 론은 본인이 멕시코에서 직접 효과를 본 약을 들고 의사인 이브 삭스(제니퍼 가너 분)를 찾아간다. 이 약의 처방전을 써달라는 요구에 이브는 "이 약들 중 어느 것도 FDA의 승인을 받은 것이 없다"고 고개를 젓는다. "환자가 필요로 하고 있다고요. FDA는 필요없어요!"라고 항의해도 소용없다. FDA의 방침은 "약물의 안전성을 입증하는 것이 우선"이기 때문이다.

FDA는 미국에서 생산·유통·판매하는 모든 종류의 품목을 통제·관리·승인하는 기관이다. 음식이나 의약품, 의료기기가 안전하고 효과적인지 확인하고 조사하는 것이 주 업무다.

약물 규제는 1960~1961년 일어난 '탈리도마이드 사건' 이후 전 세계적인 관심을 받았다. 탈리도마이드를 입덧 진정제로 처방받은 46개국 임신부 1만여명이 기형아를 낳고, 5000~6000명이 사망해 '역사상 가장 비극적인 의약품 사건'으로 꼽힌다. 이후 각국은 약물의 허가와 심의를 더욱 강화했다.

존 버논 듀크대 경제학과 교수 등 보건경제학자들은 약물 규제 정책의 장단점을 분석했다.<표 참조> 철저한 규제로 효과가 없는 약물을 시장에서 퇴출시키고, 엄격한 검사 절차와 임상시험으로 안전성을 높인다는 것은 장점이다. 또 약물이 갖는 편익과 위험에 대한 정보를 공개해 제약업체 사이의 가격 경쟁을 유도하는 것도 긍정적이다. 다만 검사나 인허가 과정이 길어지면서 개발비용이 늘어나는 것은 단점으로 꼽는다. 신약의 수가 줄고 시장에 도입되는 기간이 늦어지기 때문이다.

과도한 보호는 산업 발전 막아

결국 론은 스스로 처방한 약을 전 세계 각지에서 밀수한다. 본인만 먹는 것이 아니라 달라스 바이어스 클럽을 열고 다른 환자에게도 팔기 시작했다. 월 400달러의 회비를 내면 처방해줬다. 달리 치료약을 구할 수 없던 많은 에이즈 환자는 이 클럽에서 약을 구했다.

클럽이 번창하자 FDA와 주정부가 제지에 나선다. "각종 논문과 다른 나라의 의학저널이 이 약의 안전성을 입증한다. 제약회사만 보호하지 말고 내가 가져온 이 자료들을 검토해달라"는 론의 요구는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일각에서는 FDA와 같은 보건당국의 과도한 보호가 제약산업의 발전을 막을 수도 있다고 지적한다. 이를 가장 잘 보여주는 예는 일본이다.

과거 일본은 약품의 안전성을 강조하며 외국 제품이 일본 시장에 진입하는 것을 막는 보호무역 정책을 썼다. 그러나 이 같은 정책이 제약산업의 경쟁력을 약화시킨다는 판단 아래 1975년부터는 외국 기업 설립을 허용하고, 연구개발(R&D)에 중점을 두는 정책을 내놨다.

이런 변화에 힘입어 일본 제약사는 매출의 15~20%를 R&D에 투자하며 국제 경쟁력을 갖추는 데 집중했다. 현재 일본 제약산업은 세계 2위 규모로 성장했다. '우물 안 개구리'에서 벗어나 해외 제약사와 끊임없이 경쟁하며 가격·제품 혁신을 이뤄냈다.

물론 생명과 연관된 의약품의 규제는 엄격해야 한다는 논리에 이견이 있기는 어렵다. 영화 역시 FDA를 마냥 나쁘게 그리지 않는다. 제약회사로부터 로비를 받는 듯한 직접적인 연출도 없다.

단지 30일이라는 시한부 선고를 받은 한 남자가 두 달을 버티고, 2555일을 싸우고, 결국 7년이라는 시간을 살아내는 모습을 두 시간 동안 담담하게 그린다. 그 덕에 생존을 위해 처절하게 몸부림친 론을 연기한 매슈 매코너헤이가 또렷이 남는다. 아카데미가 그에게 올해 남우주연상을 안겨준 것은 당연한 결과였다.

이현진 한국경제신문 기자 apple@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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