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효찬의 '서울대 권장도서 100선 읽기'](44) 박지원의 '연암집' ..천하만사가 '임시방편'에 의해 무너진다

2014. 7. 7. 09: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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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암집(상·중·하)'은 돌베개(신호열·김명호 옮김)에서 출간했다. '열하일기(전 3권)'와 연암의 아들 박종채가 쓴 '과정록(번역본 '나의 아버지 박지원')'도 함께 읽어야 연암 문학의 진수를 접할 수 있다.

"한두 잔 막걸리로 혼자서 맘 달래노라. / 백발이 성글성글 탕건 하나 못 이기네. / 천 년 묵은 나무 아래 황량한 집. / 한 글자 직함 중에도 쓸데없이 많은 능관일레. / 그래도 계륵처럼 버리기 아깝구려." '재실에서'라는 제목의 시인데, 연암 박지원(1737 ~1805년)이 55살 때 종5품인 능관으로 재직할 때 지었다.

연암은 18살에 소설 '광문자전'을 썼고 45세에는 '열하일기'를 써 조선을 뒤흔들 정도로 '책의 힘'을 보여준 당대의 인재였다. 그런 그가 55세에 황량한 숲 속의 집에서 능지기로 벼슬살이를 하고 있었다. 지금으로 치면 '9급 공무원' 정도 된다.

연암은 나이 50세에 선공감 감역이라는 종9품의 최하위 공무원으로 벼슬길에 나아갔다. 연암은 당대의 베스트셀러인 '열하일기'의 작가이자 북학파의 거두였지만 늘 가난을 면하지 못했다.

그가 50세에 남들의 비웃음을 사며 미관말직을 받아들인 것도 고생하는 부인을 위해서였다. 그러나 반년도 못 돼 부인은 그만 세상을 떠나고 만다. 굶주림을 함께 견딘 조강지처가 죽자 연암은 그녀의 죽음을 애도한 시를 20수나 지었다.

"한 침상에서 지내다가 잠시 헤어진 지 하마 천 년이 된 듯 / 시력이 다하도록 먼 하늘로 돌아가는 구름 바라보네. / 하필이면 나중에 오작교 건너 만나리오. / 은하수 서쪽 가에 달이 배처럼 떠 있는데." 뒤늦게 나아간 하위 관직이어서 눈치도 보이고 체면이 영 말이 아니었을 터다. 주위에선 나이가 늦었다며 인사 승진을 위해 청탁을 하라고 권고하지만 그는 단호하게 이를 사양했다. 그는 명리를 좇지 않는 대신 그 시간을 오로지 문학에 바쳤다.

일찍 필명을 떨쳤지만 연암은 35살에 과거시험을 접고 '백수'를 자청했다. 그는 부인과 아들을 처가에 보내고 홀로 서울에서 셋방살이를 하며 작가이자 실학자로서의 새로운 길을 모색해나갔다. 여종도 집을 나가 밥을 해주는 이조차 없어 행랑사람에게 밥을 얻어먹고 있었다. 연암은 제자인 이서구에게 보낸 편지에서 당시 상황을 솔직하게 기록으로 전하고 있다.

"갈수록 등한하고 게으른 것이 버릇이 되어 남의 경조사에도 일체 발을 끊어 버렸다. 혹은 여러 날 동안 세수도 하지 않고 혹은 열흘 동안 망건도 쓰지 않았다." 그야말로 백수 생활을 하며 백수의 처량한 신세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이어 연암은 책을 보는 자신의 모습을 이렇게 묘사했다.

"자다가 깨어 책을 보고 책을 보다가 또 자도 깨워주는 이가 없으므로, 혹은 종일토록 실컷 자기도 하고 때로는 글을 저술하여 의견을 나타내기도 했다. 혹은 친구가 술을 보내 주기라도 하면 그때마다 흔쾌히 술을 따라 마셨다." 백수 시절에는 늘 술이 고프다. 그러나 이런 '참을 수 없는 존재의 시간'을 견디며 고통스럽게 공부를 해야만 비로소 상승의 길로 나아갈 수 있다. 그게 이른바 '10년 법칙'이다.

젊은 시절 술에 취하면 누구나 시인이 된다고 한다. 연암도 술에 취해 시를 지었다.

"(중략) 밥을 얻어먹는 것은 한신과 같고 / 잠을 잘 자는 것은 진단과 같고 / 거문고를 타는 것은 자상과 같고 / 글을 저술하는 것은 양웅과 같고 / 자신을 옛 인물과 비교함은 공명과 같으니…." 여기에 나오는 인물들은 다름 아닌 연암이 닮고 싶은 인물들이다.

저술가로 그는 양웅을 들었다. 전한 때 양웅(기원전 53년~기원후 18년)은 젊어서 책을 널리 읽고 시부를 잘 지었으며 빈천하면서도 부귀영달에 급급하지 않았다. 40세에 상경해 벼슬에 나아갔지만 세리에 연연하지 않고 호고낙도(好古樂道)하면서 문장으로 후세에 명성을 이룰 것을 추구하며 '태현경(太玄經)'을 저술했다.

연암은 마침내 45살에 '열하일기'로 명성을 얻고 세상의 중심에 설 수 있었다.

그러나 연암은 "겨우 한 치의 명성만 얻어도 벌써 한 자의 비방이 이르곤 합니다"라며 홍대용에게 보낸 글처럼 숱한 비방에 시달렸다. 연암은 급기야 1793년 정월 16일 규장각직각인 남공철로부터 정조의 어명을 전하는 편지를 받게 된다.

"요즈음 문풍이 이와 같이 된 것은 그 근본을 따져 보면 모두 박 아무개의 죄이다. 이자는 바로 법망에서 빠져나간 거물이다. '열하일기'가 세상에 유행한 뒤에 문체가 이와 같이 되었으니 당연히 결자해지하게 해야 한다. 신속히 순수하고 바른 글 한 편을 지어 급히 올려 보냄으로써 '열하일기'의 죗값을 치르도록 하라." 말하자면 정조가 조선의 문풍을 어지럽히는 주범으로 연암을 지목하며 반성문을 요구한 것이다. 호학군주를 자처한 정조의 이런 '전제적' 모습에 연암은 얼마나 당혹스러웠을까.

연암은 "글로써 장난거리를 삼아 (…) 모두 조잡하고 실없는 말이요 스스로 배우와 같이 굴면서 남에게 웃음거리를 제공했으니 진실로 이미 천박하고 누추하였소이다"라고 변명한다. 하지만 끝내 반성문은 쓰지 않았다.

당시 연암은 '법고창신(法古創新)'이라는 독특한 문학론을 실천했다. 즉 새로운 문장은 법고도 창신도 아니라며 "진실로 법고하면서도 변통할 줄 알고 창신하면서도 전아하다면, 요즈음의 글이 바로 옛글인 것이다"라고 주장했다. 법고창신의 문학론에 따라 창작된 작품이 '방경각외전'이다.

연암은 타락한 양반사회에서 찾아보기 힘들어진 인간적 미덕이 서민들에게는 남아 있음을 인식하고 이들과의 교유에서 인간성의 회복을 기대했다. 이게 이른바 '예실구야(禮失求野)'의 정신이다.

공자는 '예가 상실되면 재야에서 구한다'고 했다. 달리 말하자면 양반사회의 상실된 예를 재야, 즉 서민사회에서 구한다는 말이다.

연암은 역관 이홍재의 문집에 붙인 서문에서 사대부의 문학이 과거제도 때문에 날로 타락하고 있는 데 반해 고문의 전통이 오히려 역관들의 문학에서 이어지고 있음을 예실구야의 산 증거로까지 칭송한다.

'방경각외전'은 '법고창신'과 '예실구야'의 정신을 모색한 작품이다.

연암은 또 타락한 양반사회에 경종을 울리기 위해 '인순고식 구차미봉(因循姑息 苟且彌縫)'을 화두로 삼는다. 인순고식은 적당히 얼버무리는 임시방편을 구하는 것을, 구차미봉 역시 비슷한 말로 대충 해치우고 임시변통해 문제를 은폐하는 것을 뜻한다. 연암은 만년에 병풍에다 큰 글씨로 이 여덟 글자를 쓰고는 "천하만사가 모두 이 여덟 자를 따라 무너지는 법이다"라고 했다 한다. 그의 아들이 쓴 '과정록'에 나온다. 연암의 말처럼 우리 사회는 연암이 살던 시대나 우리가 사는 시대나 임시방편과 임시변통의 문화가 이미 고질병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것 같다.

"두어 올 검은 수염 갑자기 돋아났으나 / 육 척의 몸은 전혀 커진 것이 아니네. / 거울 속의 얼굴은 해를 따라 달라져도 / 철모르는 생각은 지난해나 그대로네." 이 시는 20세 때 지은 '설날 아침에 거울을 마주 보며'라는 작품이다.

연암은 18살 때 우울증으로 고생했고 말년에는 이가 다 빠져 고생했다. 연암의 삶과 글에서 나와 우리 모두를 비춰볼 수 있는 '맨 얼굴'을 만날 수 있다.

[최효찬 자녀경영연구소장·비교문학 박사 / 일러스트 : 정윤정] [본 기사는 매경이코노미 제1764호(07.02~07.08일자) 기사입니다] [ⓒ 매일경제 & mk.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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