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은 보도연맹, 아들은 월남전, 나는 송전탑

2014. 7. 5. 1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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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토요판] 이진순의 열림
밀양할매 김말해

“아이 말도 못하지 뭐. 속은 다 썩어빠지고 껍데기만 붙어서 이카고 있다.”

바싹 마른 체구에 옹이 진 손마디가 굵었다. 행랑채 앞 평상에 나와 앉은 할머니 앞으로 레미콘차량 한 대가 기우뚱거리며 먼지를 일으키고 지나갔다. 종일 버스가 두 번 지날 뿐이던 산골 오지에, 이젠 레미콘차와 살수차, 경찰차들이 밤낮없이 수시로 들락거린다. 할머니 집 바로 건너편 산 중턱으로 송전탑 건립에 필요한 시멘트를 실어 나르는 중이라고 했다.

“잠을 못 자. 경찰차도 밤새 시동 걸어놓고 삐뜨리뻐뜨리 (번쩍번쩍) 그카고. 자다가도 내다보면 속에서 불이 나. 욕이 나와.”

지난 6월11일, 선거가 끝나기 무섭게 밀양에 ‘행정대집행’이 실시되었다. 송전탑 건립에 반대하던 주민들의 농성장과 움막을 철거하겠다고 경찰과 공무원 2000여명이 들이닥쳤다. 경찰은 커터칼로 움막을 찢고, 끌려가지 않으려고 쇠사슬로 칭칭 동여맨 주민들의 맨몸에 절단기를 들이댔다. 하루 사이 열아홉명이 응급실에 실려 갔다. 강제철거와 동시에 한국전력은 지난 8개월간 중단되었던 공사를 재개했다. 이것으로 끝일까? 지난 10년간 송전탑에 반대하던 주민들은 지금 어떻게 지내고 있을까? 765㎸ 송전탑 아래서도 삶을 이어나가야 하는 그들은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정신대를 피해 열여섯에 시집와
남편이 끌려가서 안 돌아온 뒤
무서워 밤마다 칼을 놓고 잤다
두 아들은 다치거나 죽었고
할머니는 765㎸ 흉물과 전쟁중

“박근혜 대통령 불쌍타고
우린 다 찍어줬거든, 그라이
이거 한마디만 전해주소
골짜기 사람이 싫다고 하면
딴 데로 옮겨라, 그기 한이다”

“일기를 썼으면 방 두 개 채울 텐데”

김말해(86) 할머니는 경남 밀양시 상동면 도곡마을 사람이다. 도곡리 윗마을에서 나고 아랫마을로 시집와 평생을 살았다. 할머니가 뼈를 묻을 곳도 이곳이다. 고령의 할머니 혼자 사는 집이라곤 믿을 수 없을 만큼 살림은 가지런하고 깔끔했다. 장독대 항아리들은 반질반질 윤이 나고 가마솥 옆엔 장작이 가지런했다. 대문엔 아들 이름을 박아 넣은 문패와 태극기가 나란히 걸려 있었다.

-태극기는 왜 걸어놨나?

“태극기 펴는 날은 펴놓고, 아닌 날은 (끈으로) 묶어 놓는다. 얼마 전 현충일 날은 펴놨다가 지금은 말아둔 거다.”

-이 집에 혼자 사시나? 적적하지 않으신가?

“이제 늙어서 그렇지 뭐. 큰아들이 자주 온다.”

-6월11일날 경찰들 왔을 때 할머니는 어디 계셨나?

“그때 나는 빙(병)나 가지고 못 갔다. 내가 지금 팔을 몬 쓴다. 가스나(여경)들이 밀어가지고.”

-언제 다치신 건가?

“음력 2월 열하룬가, 양력으로 며칠인고. 비가 부슬부슬 오는데 저기 저수지 앞 움막에 있는 걸 경찰들이 끌어내는데. 전쟁이 따로 없지. 영 죽어삐리는지 알았다. 깨나 보니 병원이라카대. 닝기루(링거)병 끼워가….”

-정신을 잃으셨단 얘긴가?

“내가 왜 여기 와 있나… 했지. 친척 동상이 그라데. ‘누님, 아까 죽어가지고 여기 싣고 안 왔는교.’ 그때 다쳐서 인대가 나갔다. 지금도 오른쪽 팔을 못 써서 숟가락도 못 든다. 왼손으로 이래 받쳐 들고.”

-연세도 많으신데 잘못되면 어떡하시려고….

“죽으면 죽고 살면 사는 기지. 저 산 위에서 (송전탑 공사 예정지에서) 싸울 때도 세 시간을 기어서 올라갔다. 기느라고 손끝이 다 벌어졌다. 이래도 죽고 저래도 죽고.”

-이제 움막도 철거되고 공사도 일사천리로 진행되고 있다. 싸움은 끝난 건가?

“끝나다니? 아직 멀었지. 줄(전선) 걸고 할 때까지 싸워야지. 저거 (송전탑) 세우는 데는 석 달 걸려도 뜯는 데는 한나절밖에 안 걸린다더라. 죽을 때까지 싸워야지. 저기 바로 보이는 저 철탑이 우리 시어른 산소가 있는 덴데 내가 거기도 몇 번을 갔다. 원래 처음엔 (송전탑을) 저 산 위로 할라?는데 내려와?ㅄ? 그래서 우리 산소에까지….”

-송전탑 위치가 바뀌었단 말인가? 산 위에서 아래로? 왜 바뀌었나?

“모른다니까, 개놈들이.”

-주민들하고 상의가 없었나?

“상의가 무신 상의? 즈그 멋대로 해뿐다니까. 즈그는 다 법이 있어서, 땅 파고 나무 다 비고(베고) 해도 우린 말 한마디 할 수가 없다. 순사놈들이 설치는데 어디다 말하겠나? 즈그는 법이 있고 우린 무법이라카는데. 우리는 억울해도 분을 풀 데가 없다.”

-정치하는 사람들도 여기 왔다 가지 않았나?

“와봐야 뭐 어느 놈이 어느 놈인지 알 수가 있어야지. 우리는 법이 없다카이. 우리 법을 좀 맨들어줘야 말이라도 하는데.”

-이번 지방선거에서 투표는 하셨나?

“했지. 투표했는데 4번 찍어줬더니 안 됐다케.”

-4번은 무소속인가?

“무소속. 송전탑 반대 도와준다 했는데. 와 안 됐노? 아까바 죽겠다.”

-대선 때는 어땠나?

“박근혜 찍었지. 지 엄마 아부지 죽어서 불쌍하다꼬. 내내 테레비 보면서 문재인이 (지지율이) 올라오면 박근혜 안 될까봐 엄청 맘 졸이면서 되라, 되라 했구만.”

-그래서 박근혜 대통령이 당선되었을 때 좋으셨나?

“아무 쓸데 없다. (대통령이 나서서) 말 쪼매, 좁쌀만치만 해줘도 우리 군민들이 편할 텐데… 우리만 답답하다. 여전히 무법이고.”

할머니가 깊은 한숨을 토해냈다. 지나온 한평생, 법과 권력은 그의 편이었던 적이 없다.

“내가 일자무식이라 내 이름도 못 쓴다. 글을 알아 내 살아온 걸 일기로 썼으면 방 두 개를 채울 텐데…. 내 살아온 건 말로 다 몬한다.”

아들 찾으러 갔다 피 토하고 죽은 시어머니

김말해 할머니는 1928년, 1남3녀의 막내로 태어났다. 일제 공출에 곡식이며 놋쇠며 남아나는 게 없었다. 짚신 한 켤레가 없어 맨발로 나물을 캐러 다녔고 고구마 한 개를 쪄서 식구들이 갈라 먹기도 했다. 콩깻묵과 시락국(시래깃국)으로 허기를 채우는 날도 부지기수. 일본에 징용 갔던 큰오빠는 6년 만에 돌아왔는데, 오빠 얼굴을 잊어버린 막내 말해는 순사가 오는 줄 알고 겁이 더럭 나서 숨어버렸다. 십오륙 세만 되어도 정신대로 끌려가던 시절이었다. 정신대를 피해 혼사를 서둘렀다. 우리 나이 열일곱에 아랫마을 전씨 집안으로 시집을 갔다.

-위아래 마을 살았으니 신랑도 본 적 있었겠다.

“가스나가 남의 집 총각을 어떻게 보노? 혼약 맺은 후에 신랑이 우리 마을 연못 파는데 왔다고, 집안 올케들이 ‘니 신랑 못 파러 왔더라, 가봐라’ 하는데 내다도 안 봤는걸.”

-그럼 할아버지 얼굴은 시집가는 날 처음 본 건가?

“첫날도 옳게 못 보고 이튿날 봤지.”

-첫인상이 어떻던가?

“뭐 인상은 괜찮데. 꼬라지도 내보다 낫고.”

-잘생겼던가?

“좀 생겼대. 내삐리진 않겠더라.”

-할아버지가 한문도 잘하셨다던데.

“막내아들이라고 야간공부 시키다가 한문 시켰다카대. 글이 좋다고 했어. 내가 글 모른다고 한탄하니, ‘내가 베아(가르쳐)주꾸마. 니 일 다해놓고’ 했지.”

문자를 아는 게 화근이었을까. 해방이 되고 동네에서 반장을 맡았던 남편이 어느 날 잡혀갔다. 1950년 봄이었다. ‘보도연맹’ 건이라고 했다. 신랑의 나이 스물여섯, 말해의 나이 스물셋일 때였다.

국민보도연맹은 1949년 좌익 전향자들을 계몽 지도할 목적으로 설립되었는데 그 수가 49년 말엔 최고 30만에 달했다. 원래 ‘사상범의 교화’를 목적으로 했지만 지역별 말단행정조직에 반강제적으로 등록 인원수가 할당되어서, 좌익과는 관련 없는 양민들이 영문도 모른 채 가입하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6·25전쟁이 발발하고 전세가 불리해지자 이승만 정부는 이들에 대해 법적 절차 없이 대규모 즉결처분을 단행했다. 그 학살의 규모가 수만에서 20만명 안팎으로 추정되고 있으나, 아직 학살의 진상은 밝혀지지 않고 있다.

-왜 잡혀갔는지 아시나?

“빨갱이 심부름 했다고 빨갱이라고. 아무것도 안 하고 반장질만 했는데. 이 동네에서 동갑내기 둘이 갔는데 아직 안 와. 60년, 70년이 됐는데.”

-어디로 끌려갔나?

“처음엔 상동국민학교로 훈련 받으러 간다카디만, 저 아래 공장을 하나 빌려서 가둬놨어. 첨 잡혀간 건 3월인데 5월 되니 날도 더워지고. 그래서 미숫가루 빻아서 담고, 삼베옷 한 벌 지어서 면회를 갔지. 돌배기 작은아들을 업고 갔는데 순사가 때려서 내 허리도 시퍼렇게 멍들고, 알라(아이) 다리도 새파랗게 멍들고. 맞아가지고.”

-면회 온 사람을 왜?

“못 오그로. ‘이런 게 무슨 서방이라고 보러 오나?’ 해서 맞았지. 아, 이 얘기 더 몬하겠다.(눈물)”

그때의 설움이 복받치는지 할머니가 왈칵 눈물을 쏟았다. 바싹 말라 물기라곤 없어 보이는 주름진 얼굴 위로, 끈끈한 눈물이 번져 내렸다.

-그러곤 영영 남편을 못 보신 건가?

“6월달에 난닝구 두 개랑 빤쓰랑 사가지고 갔더니 사람은 다 없어지고, 마당에 물건 다 모아서 태와 뿌고. 이웃 사람한테 물어보니까 밤에 트럭 위에 다 덮어가지고 실어내 ?〈耗ダ?”

-어디로 데려갔다던가?

“모르지. 산골짜기 어디 데려가 죽였을까. 그래도 10년간은, 이제 오나 저제 오나 싶어서, 양복이랑 구두 억수로 존 거 쟁여놓고 기다렸다.”

-할아버지 오시면 드리려고?

“보자기 곱게 싸서 선반에 얹어놓고 기다렸어.”

-같은 해 시어머니도 돌아가셨는데….

“9월 되니까 날이 추워지잖아. 아들, 삼베옷 입혀서 내보내놨으니. 시어머니가 ‘야야, 솜누비 한복 한 벌 내놔라’ 그카길래 ‘어무이, 가지 마이소’ 하고 말렸는데 ‘내가 답답해 죽겠다. 내 새끼 보고 싶어 몬 살겠다’ 하고는 아들 찾아 길을 나섰어.”

-어디로 찾으러 가신 건가?

“종일 걸어서 삼랑진역, 밀양역, 공장이란 공장 다 뒤지고 다니다가 밤 열한시나 돼서 돌아왔는데. 오자마자 보따리 탁 내려놓더니 ‘아이고 나 죽겠다. 우리 아들 얼어 죽는다’ 하곤 픽 쓰러?다. 안아서 방에다 눕혀 드렸는데 밥물도 못 넘기시고, 고마 피를 줄줄 내놓데. 입으로 피를 한 그릇 토하고 아래로도 피를 싸고. 나중에 보니 가슴에 시퍼렇게 멍이 들어 있더라고….”

-누가 그런 짓을?

“아들 찾아다니다가 경찰서를 갔거나 그랬겠지… 그런지 3일 만에 돌아가셨다. 우리 큰애 불러서 손 한번 만져보고. 내 손 잡고 ‘내 가슴 좀 쓰다듬어줘라’ 눈물 주르르 흘리고, 그길로 세상 버려?ㅄ?”

나이 스물셋에 시부모도 남편도 없이 홀몸이 되었다. 다섯 살, 두 살짜리 아들 형제를 거둬 먹이느라 몸이 부서져라 일했다. 나뭇짐 150근을 이고 밀양까지 40~50리 길을 맨발로 걸어 다녔다. 어린것들 데리고 죽으려고 웅덩이에 갔다가 차마 죽지 못하고 돌아선 일도 있었다. 그렇게 고생해서 한푼 두푼 모은 돈으로 논 600평, 밭 600평을 장만했다. 혼자 힘으로 빚을 내서 단출하나마 지금의 집도 장만했다.

-젊은 여자 혼자 산다고 못살게 구는 사람 없었나?

“그라다가 내한테 욕 바가지로 먹으려고? 칼도 갖다놓고 잤는데.”

-칼은 왜?

“옛날에는 문이 종이로 이래 발라져 있었잖아. 안에 손가락 들어오면 탁 끊어뿔라꼬.”

-괜찮은 남자 만나서 팔자 좀 고치시지.

“그땐 그런 생각 해 보지도 몬했다.”

-아이들 키우면서 제일 미안하고 속상한 게 뭐였나?

“요새는 여자들 벌이도 좋지만, 그땐 돈 천원 벌기가 힘들었으니까. 바지 하나 옳게 못 사 입히고, 공부 못 시키고, 요새 같으면 일본 유학까지 시켰을 텐데….”

-그래도 혼자 힘으로 이렇게 집도 마련하고 논밭도 장만하셨지 않나?

“이거 장만한다고 욕봤어. 이 집 사놓고 울기도 많이 울고. 우리 신랑 오면 자랑할라꼬.”

-그런데 안 오셔서….

“내, 집 사놨다. 나는 집 사놨는데 니는 뭐하노….”

묶여버린 이 땅, 포기할 수 없는 삶의 전부

입에 풀칠하기 급급해서 자식들 상급 학교 보내지 못한 게 늘 미안하고 죄스러웠는데, 군에 간 큰아들로부터 어느 날 “어머니, 저 월남 갑니다” 하고 편지가 날아왔다. 청천벽력이었다. 알고 보니 지원을 한 게 아니라 부대에서 차출이 된 건데, 부대에 아는 사람한테 돈을 좀 쓰면 빼낼 수 있을지 모른다는 소문에 귀가 솔깃했다. 논 다 잡힌다 생각하고 이웃집에서 돈 20만원을 꿔서 강원도 오음리로 찾아갔는데 아들은 담날 새벽 부산으로 내려간다고 했다. 새벽녘 부산3부두에 도착해 보니 아들은 이미 배에 오르고 있었다.

-아들이랑 만나기는 하신 건가?

“가니까 벌써 고동소리 뿌우우 거려. 헌병들 멱살 잡으면서 ‘야, 이놈들아, 내 자식이 월남까지 가는데 왜 못 만나게 하노?’ 울고불고 그랬다꼬. 우리 아들은 나 볼라고 뱃머리에 올라서서 깃대를 흔들고. 부응부응 배 떠나는데 뒹굴고 울고….”

아들이 떠난 뒤 일구월심 빌고 또 빌었건만, 아들은 무사하지 못했다. 3년 전역을 앞두고 헬기에서 내리다가 허리를 크게 다쳐 부산 육군3병원으로 돌아왔다. 여덟 시간에 걸친 긴 수술을 끝내고도 마취에서 깨어나질 못해 생사를 헤매다가 간신히 의식을 회복했다. 그사이 어미의 마음은 아들과 함께 생과 사를 넘나들었다. 몸이 불편하니 변변히 일도 못 해 이리저리 떠돈 큰아들이 지금도 할머니는 안타깝기만 하다. 순하고 여리기만 하던 작은아들도 4년 전, 예순둘 아직 창창한 나이에 병을 얻어 세상을 뜨고, 작은며느리마저 작년 여름에 아들 뒤를 따라갔다.

할머니는 지금도 집안 구석구석을 깔끔히 정리하고 매만진다. 코앞으로 흉물스런 송전탑이 줄줄이 들어섰지만 할머니에겐 여전히 떠날 수 없는 고향이다. 아이들과 죽으려 했던 저수지, 시부모님의 묫자리, 어렵게 장만한 감나무밭…. 송전탑이 들어서서 이제는 농사를 짓기도, 담보대출을 받기도 어렵게 묶여버린 이 땅이, 할머니에겐 3대에 걸친 가족의 역사요, 삶의 전부이다.

-차라리 일찌감치 배상금 받고 포기할걸, 몸만 다치고 얻은 것도 없고… 이런 후회 한 적 없나?

“후회 안 한다. 우리 시어른 저기 모셔놨으이… 저기 송전탑 아래 5미터도 안 되는데.”

-무얼 바라시나? 보상을 더 받는 것, 아님 공사를 안 하는 것?

“보상 안 주고, 공사 안 하면 내가 춤을 추겠다.”

-보상 제대로 받고 딴 데 가서 살면 되지 않나?

“아이고, 늙어서 어디 갈 낀데. 내 고향에서 죽어야지.”

-할머니 글 몰라서 하고 싶은 말 못 쓰셨다 했는데, 내가 대신 적어드리겠다. 꼭 하고 싶은 말씀 한마디!

“박근혜 대통령에게… 즈그 아버지 즈그 어메 억울하게 죽었다꼬, 시집도 못 갔다고, 불쌍타고 우린 다 찍어줬거든. 그라이, 이거 한마디만 전해주소.”

-그대로 받아 적겠다.

“골짜기 사는 사람이, 싫다고 하면, 그만하고, 딴 데로 옮겨라. 그래 해주면, 최고로 좋겠다. 그기 한이다. 한….”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할머니 집 담장 너머로 번갯불 아래 번쩍이는 송전탑이 보였다. 그 밑에 사람들이 살고 있다. 아직 아무것도 끝나지 않았다.

녹취 김혜영(세명대 저널리즘스쿨 대학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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