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사일언] 피아노는 실내악의 등대

김주영·피아니스트 2016. 5. 5. 0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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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주 경험이 쌓일수록 실내악의 묘미를 실감한다. 실내악 연주자들에게는 공연보다 리허설할 때가 더 흥미롭다. 함께 연주하는 악기들의 특징들을 새삼 깨닫고, 다른 사람의 관점에서 작품을 보는 기회를 가질 수 있기 때문이다.

다만 맨 뒤에 자리 잡은 피아노 연주자는 약간의 부담을 견뎌야 한다. 내 앞에 포진한 현악기·관악기가 항해를 시작한 후 등대나 나침반 역할을 흔들림 없이 해야 하기 때문이다. 보통 딴 악기들은 자신이 연주해야 할 음표만 적힌 악보를 보면서 연주한다. 모든 악보가 들어가 있는 '총보'는 피아니스트 앞에만 놓이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연습 도중 착오가 있거나 전체를 확인해야 할 땐 내 악보가 기준이 된다.

거기까진 괜찮다. 호흡을 맞추기 어려운 작품일 때면 리허설 말미에 꼭 들려오는 멘트가 있다. "이번 곡은 음정이나 리듬이 워낙 어려워서 피아노를 잘 듣고 해야겠어요. 잘 부탁드려요." '결국 연주의 모든 성패가 내게…?' 하는 생각에 온몸이 떨린다. 그래도 미소 띤 얼굴로 걱정 말라 고개를 끄덕인다.

피아노가 있는 실내악에서 피아니스트는 야구의 포수 같은 역할을 한다. 멜로디를 연주하는 고음(高音) 악기의 반주를 해 주고, 베이스 라인을 연주하는 저음 악기를 따라가며 응원해 준다. 보통은 앞에 있는 악기들 소리가 묻힐까 절제하며 조심스레 연주하지만 큰 음량이 필요할 땐 천둥소리를 내주기도 한다. 실제 포수처럼 주자와 몸을 부딪히거나 투수가 던진 공을 쫓아 뛰어다니는 '사건'은 일어나지 않아도 듬직하게 버티고 서 있는 '피아노 담당'이란 자체에 자부심을 느낀다.

무대에서 홀로 서기 할 때 가장 빛나는 피아노가 어째서 포수인가 의아할 수 있다. 하지만 멀티플레이어의 면모, 주·조연을 가리지 않고 자신의 위치에서 모든 걸 해결하는 수퍼히어로의 모습 또한 '악기의 왕'을 설명하는 요소다. 어떤 자리에서든 자기 역할에 충실한 피아니스트라면 박수를 받아 마땅하다. 홈런을 치는 '공격형' 포수나 도루하는 주자를 아웃시키는 '수비형' 포수 둘 다 멋진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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