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사일언] 백남준이 띄운 '힐러리 풍선'

탁현규 간송미술관 연구원 2016. 5. 4. 03: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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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힐러리를 좋아해. 그녀는 재미있어. 그녀는 여전히 젊고 예뻐."

비디오 아트의 아버지 백남준이 2002년 일흔 살 생일을 앞두고 뉴욕타임스 인터뷰에서 당시 뉴욕주 상원 의원이던 55세의 힐러리를 두고 한 말이다. 당시 백남준은 힐러리를 주인공으로 한 풍선을 만들어 맨해튼 파크 애비뉴에 띄울 생각이라고 했다. 2년 후인 2004년, 백남준 뉴욕 입성 40주년 기념 퍼포먼스와 인터뷰가 조선일보 10월 6일 자에 실렸다.

사진 속에는 1996년 뇌졸중으로 몸이 불편한 백남준이 휠체어에 앉아 환히 웃고 있고 그 뒤로 조개껍데기 위에 나신으로 있는 여인 모습의 거대한 풍선이 스튜디오 천장까지 꽉 차 있었다. 한눈에 봐도 르네상스 화가 보티첼리의 '비너스의 탄생'에서 비너스만 따온 걸 알 수 있었다. 그런데 세상에! 얼굴은 무표정하고 갸름한 비너스가 아니라 활짝 웃고 살집 있는 힐러리가 아닌가. 2년 전 말했던 '힐러리 풍선' 구상을 작품으로 확인하는 순간이었다.

뉴욕의 볼거리 중 하나가 추수감사절 퍼레이드에 등장하는 거대한 캐릭터 풍선이다. 그런데 2001년엔 9·11 사태로 퍼레이드에서 풍선을 띄우지 못했다. 백남준은 실의에 잠긴 뉴욕 시민을 위로하기 위해 캐릭터 풍선 형태 작품을 생각했고, 거기에 들어갈 사람으로 당시 뉴욕주 상원 의원이었던 힐러리를 선택했으리라. 그는 1998년 백악관 만찬에서 퍼스트레이디였던 힐러리를 만난 적이 있었다. 비록 바지가 벗겨지는 해프닝이 있긴 했지만.

슬픔을 웃음으로 승화시키는 것은 한민족의 타고난 심성이 아니던가. '힐러리 비너스'는 한국의 낙천성(樂天性)과 서양의 고전(古典), 미국 문화를 한데 멋지게 버무린 작품인 셈이다.

백남준이 저세상으로 간 지 벌써 10년이 되었다. 마침 내년에 힐러리가 일흔이 되니 백남준의 원래 생각대로 파크 애비뉴 나무에 이 풍선을 매단다면 힐러리 축수(祝壽)도 되고 백남준을 더 많이 기억하지 않을까. 한 가지 걸리는 게 있기는 하다. 힐러리가 대통령이 되면 아무리 자유로운 미국이어도 어려울 듯하다. 벌거벗은 임금님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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