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사일언] 즐기는 者에겐 못 당한다

장병원 전주국제영화제 프로그래머 입력 2016. 2. 12. 03:04 수정 2016. 2. 12. 10: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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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직업은 영화 보는 게 주 업무다. 원근 각지의 오만 가지 영화를 봐야 영화제에 초청할 작품을 고를 수 있다. 좋아하는 일 하면서 돈도 번다며 부러워하는 사람이 많다. 잘 모르고 하는 소리다.

영화 고르는 일은 이만저만한 스트레스가 아니다. 이 글을 쓰는 지금도 해외영화제 출장을 나와 있는데 하루에 10편씩 영화를 본다. 1년간 보는 영화는 줄잡아 1000편이 넘는다. 실은 '본다'라는 말이 멋쩍다. 음미하면서 하는 감상이 아니라 스캔 수준으로 훑는 일이 더 많기 때문이다. 해외 영화제에 간다고 하면 매일 밤 휘황한 레드카펫을 감상하는 줄 안다. 실상은 비디오 라이브러리에서 모니터로 영화를 보는 게 일상이다. 2년 전에는 출장지에서 여권과 출장비, 노트북이 든 가방을 강도 맞은 적도 있다.

여기까지는 엄살이다. 영화제 프로그래머 일은 상당한 즐거움도 준다. 세계 영화계의 최신 흐름을 가장 빨리 접할 기회가 저절로 주어진다. 영화 애호가들에게 먼저 본 영화에 대한 촌평을 쏟아낼 때면 으쓱해진다. 유럽, 미주, 남미의 도시를 수시로 유람하는 건 평범한 직장인이 꿈꾸기 힘든 호사(豪奢)다. 출장을 구실로 한 외유는 밥벌이의 고단함에서 벗어나는 해방감을 준다. 감독, 프로듀서에게는 분에 넘치는 대접을 받기도 한다. 그들은 프로그래머를 자신의 예술적 야심에 응답할 메신저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모든 직업에는 명암이 있다. 자기 분야에서 열심을 다하는 이들이라면 직업적 세계의 명암을 경험할 것이다. 직업은 생계 수단이지만 적성과 능력도 따라야 한다. 적성은 일에 즐거움을, 능력은 더 나은 미래를 보장한다. 내 적성과 능력이 이 일에 부합하는지는 모르겠다. 업(業)으로 삼은 직분을 오래, 그리고 잘하려면 이 명암 조절을 잘해야 한다. 누군가는 즐기고, 누군가는 힘겨워한다. 즐기는 자를 당할 재간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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