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사일언] '고길동' 할아버지
설 연휴 동안 아이들과 함께 쌍문동 '둘리 뮤지엄'에 다녀왔다. 둘리 캐릭터를 테마로 한 아담한 박물관이다. '아기공룡 둘리'(1983, 김수정)는 오래전 어린이 만화잡지 '보물섬'에 연재되었던 유명한 만화다. 남극 빙하 속 냉동 상태로 있던 아기 공룡이 한강까지 흘러 내려와 쌍문동의 평범한 가정집에서 살게 되면서 이야기가 시작된다.
둘리가 '호잇' 하며 손가락을 펼치고 주문을 외우면 마법처럼 모든 문제가 해결됐다. 40대 초반으로 추정되는, 둘리와 사사건건 다툼을 벌이는 '고길동'도 주요 인물이었다. 박물관을 돌아보다가 나는 '고길동'에 감정이입이 돼 버렸다. 80년대 초, 쌍문동에서 자식 두 명과 입양한 조카와 동거인 세 명을 키워내야 했던 그의 삶이 달라 보였다. 실존한다면 70세가 훌쩍 넘었을 '고길동'이 세상 여기저기에 존재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공룡 둘리에 대한 슬픈 오마주(2009, 최규석)'라는 만화가 있다. 이 만화는 30여년이 지나 어른이 되어 버린 둘리의 쓸쓸한 삶을 보여준다. 어른 둘리는 변변한 직업도 가지지 못했다. 공장에서 일하다 손가락을 잃었고, 초능력은 사라져 버렸다. '호잇' 하고 주문을 외치지만 공허한 울림만 맴돈다. 현실은 더 이상 명랑만화가 아니다. 어른 둘리와 친구들은 모두 과거의 '고길동'처럼 치열한 삶을 살지만 현실은 만만치 않다. 물론 둘리만 나이를 먹은 것은 아니다. 과거 함께 꿈을 꾸던 어린이 독자들도 이제 그 시절 '고길동'만큼 나이가 들어 버렸고 복잡하고 힘든 현실을 살아가고 있다.
병원에서 나는 '고길동'과 비슷한 연세의 어르신들을 매일 만난다. 여기저기 아프다고 말씀하시는 그들도 젊은 시절에 대해 여쭤보면 한결같이 "내가 그때 정말 열심히 일했었지"라며 눈을 반짝이신다. 그들을 보고 있으면, 명랑만화 속에서도 혼자 고독할 수밖에 없었던 30년 전 '고길동'이 겹쳐 보인다. 과거의 '고길동'과 현재를 살아가는 '어른 둘리'들 모두에게 병신년 새해가 행복하기를 기도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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