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사일언] 며느리의 눈물

박미림 조선일보 신춘문예 동시 당선자·재동초교 교사 2016. 2. 10. 0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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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에 불려 뽀얗게 껍질 벗긴 녹두는 전을 부칠 재료다. 방앗간에서 갓 빼온 떡국 거리 가래떡도 한 소쿠리나 된다. 이건 꾸들꾸들할 무렵 어깨가 아프도록 썰어야 한다. 그나마 해마다 빚던 만두를 올핸 특별히 사기로 했다. 음식 솜씨 서툰 며느리는 끙끙거리며 녹두를 갈고 전을 부친다. 팔순 넘은 어머니는 가족에게 먹일 음식거리를 이것저것 자꾸 꺼낸다.

쉬지 않고 꼬박 서너 시간 쪼그려 일하고 나니 허리에서 우두둑 소리가 난다. 리모컨을 든 남자들은 팔베개를 하고 한쪽 눈은 텔레비전에 고정한 채 외친다. "점심은 안 주나?" 남자들의 그 끝없는 어리광에 다시 태어나는 세상의 여자들. 그들의 또 다른 이름은 며느리요, 시어머니인 것이다.

젖은 손을 닦고 잠시 쉬고 있는 내게 고불고불 늙으신 어머니가 들어오셨다. "힘들지? 좀 쉬거라." "그런데 이것 좀 한번 들어볼래?" 방금 전 쉬라고 하시고는 그새 말씀을 고치신다. "예전 시집살이하던 며느리가 부지깽이 두들기며 부르던 아리랑이야." 대답도 듣기 전에 우리 어머니 구성진 아리랑을 불러낸다. 애련한 저 노랫가락은 잊힌 '괴산아리랑'이라던가?

"팔라당 팔라당 갑사나 댕기 본때도 안 묻어 사주가 왔네. 시동생 장가가서 좋댔더니 나뭇가리 줄어드니 또 생각나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시어머니 죽어서 좋댔더니 보리 방아 물붜보니 또 생각난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나는 당신의 시집살이를 알지 못한다. 하지만 저것은 당신의 넋두리가 분명할 것이다. 어머니의 노랫가락은 젖어 있다. 나는 착하게도 열여섯 소절이나 되는 눈물 나는 아리랑을 다 들어 드렸다. 가족이란 보잘것없는 개인사를 들어주고 기억해 주는 존재일 것이다.

"이 많은 떡을 언제 다 썰까?" 방금 전 투덜댔던 사소한 일들을 반성한다. 그리고 전 생애가 가족뿐이었을 모든 무명(無名)의 어머니를 예찬한다. 수천년 붉은 해를 떠오르게 한 막강한 힘, 그것은 남자들의 근육질 때문만은 아니라고. 세상의 며느리와 시어머니 그녀들이 부엌에 떨군 눈물 덕분일 것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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