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진자들의 비정한 얼음물 놀이

2014. 9. 5. 15: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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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토요판] 정문태의 제3의 눈

(30) 아이스 버킷

▶ 정문태 1990년부터 타이를 베이스 삼아 일해온 국제분쟁 전문기자. 23년간 아프가니스탄·이라크·코소보를 비롯한 40여개 전선을 뛰며 압둘라흐만 와히드 인도네시아 대통령, 훈센 캄보디아 총리 등 최고위급 정치인 50여명을 인터뷰했다. 저서로 <전선기자 정문태 전쟁취재 16년의 기록>(2004년), <현장은 역사다>(2010년)가 있다. 격주로 국제뉴스의 이면을 한겨레 독자들에게 들려준다.

'근위축성측색경화증' '근육위축측삭경화증' '근육위축가쪽경화증', 뭐가 됐든 다 어렵기만 하다. 루게릭병(ALS)을 말하려니 심사가 참 어수선해진다. 하기야 1930년대 이 병을 앓았던 미국 야구선수 이름에서 따왔다는 루게릭병이란 말도 그리 만만치는 않지만, 아무튼.

이 병 이름을 놓고 의료전문가들도 헷갈리는 모양이다. 일본식 한자(筋萎縮性側索硬化症)를 그대로 베껴 쓰다 보니 같은 병을 부르는 말이 대한의학회와 서울대병원과 연세대세브란스병원이 다 다르다. '索'이란 한자를 놓고 '색'이나 '삭'으로 의사마다 달리 부르고들 있다. 뭘 찾거나 바랄 때는 '색'으로 읽고 흩어지거나 사라지거나 숫자를 세거나 혼자를 뜻할 때는 '삭'으로 읽는 게 이 한자 속성이다. 베낄 때 베끼더라도 읽기만은 바로 읽고 용어라도 통일해야 할 텐데, 그렇게 일본제국주의자들이 깔아놓은 의학 용어를 아무 생각 없이 베껴온 게 벌써 100년째다. 이렇게 사람들이 뜻도 알 수 없는 이름을 헷갈리게 붙여 놓고는 희귀 난치병에 대한 사회적 무관심을 나무라는 건 지나치다. 루게릭병이 다도 아니다. 루게릭병처럼 희귀 난치병으로 부르는 것만도 2천여 종에 이른다. 그 분야 전문가가 아닌 다음에는 의사들도 모르긴 마찬가지다. 엘레르스-당로스 증후군이니 타이로신혈증 같은 이름을 던져 놓고 사회적 무관심을 탓할 수 있을까? 왜 그동안 루게릭병을 비롯한 희귀 난치병 환자들이 소외당해 왔는지 의료 쪽이 먼저 대답해야 하는 까닭이다. 병도 잘 알고 병 이름도 잘 아는 의사들이 나서서 제 나라 사람들이 알아들을 수 있게끔 용어를 다듬고 통일하는 일이 희귀 난치병에 대한 사회적 관심을 끌어내는 첫걸음이 아닌가 싶다.

셀레브리티 존재감 확인하는 놀이터

루게릭병 환자를 돕겠다는 아이스 버킷 챌린지가 두어 달째 접어들면서 온 세상이 난리다. 동남아시아 쪽도 그렇다. 타이에서는 백화점 행사로 한꺼번에 수백명이 얼음물을 끼얹는 쇼를 벌이기도 했다. 이름난 가수 라타품은 서울 길바닥에서 웃통을 벗고 얼음물을 뒤집어쓰다 한국 경찰한테 잡혀 벌금 5천밧(16만원)을 물었다는 뉴스를 날렸다. 캄보디아에서는 훈 센 총리 아들이자 하원의원인 훈 마니가 배우와 가수들을 이끌고 얼음물을 뒤집어쓰며 막을 올렸고 필리핀에서는 참여자 수가 세계 8위라고 자랑스레 떠들어대는 뉴스도 들려온다. 무슬림 국가들인 말레이시아와 인도네시아 쪽에서도 8월 말부터 얼음물을 끼얹기 시작했다. 그런가 하면 가뭄에 시달리는 중국 남부 하이난섬 사람들은 '노 아이스 버킷 챌린지'(No Ice Bucket Challenge)를 벌이기도 했다.

타이 백화점서 수백명 얼음물쇼캄보디아 훈센 총리 아들도배우·가수들과 함께 뒤집어써필리핀은 참여자수 8위라 자랑아시아까지 정상이 아니다'돈 내든지 얼음물 뒤집어쓰든지'놀이방법이 아주 폭력적이다흔히 봐온 공격적 미국 문화다'항복하든지 폭탄을 맞든지'강요만 있을 뿐 선택 여지가 없다

이건 정상이 아니다. 적어도 아시아 쪽에서 볼 때는 그렇다. 얼음물 놀이 같은 건 오직 이문을 쫓는 언론의 호들갑이고 연예인이나 정치인 같은 딴 세상 사람들 이야기일 뿐이다. 반도 넘는 시민이 마실 물마저 없고, 40%에 이르는 시민이 굶주림에 시달리고, 온 천지가 전쟁이고 날마다 사람들이 죽어나가는 판이다. 아시아는 아이스 버킷 챌린지 같은 놀이를 할 만한 현실적 조건도 없고 문화적 전통과도 어울리지 않는다. 한마디로 이 아이스 버킷 챌린지란 건 미국식 문화고 미국식 놀이일 뿐이다.

보라. '돈을 내든지 얼음물을 뒤집어쓰든지' 이게 바로 미국식 문화다. 놀이 방법이 아주 폭력적이다. 이런 협박성 캠페인은 그동안 흔히 봐왔던 공격적인 미국 정치문화다. '항복하든지 폭탄을 맞든지' 이게 이라크, 유고, 아프가니스탄, 리비아 침공 때 써먹었던 미국식 흥정이었고 이게 다시 이란과 시리아를 향하고 있다. 이런 문화는 독선적인 결정과 일방적인 강요만 있을 뿐 선택의 여지가 없다. 상대가 뭘 택해도 잃을 수밖에 없도록 만드는 아주 상징적인 강자들의 문화다. 그 결과는 '기부도 하고 얼음물도 뒤집어썼다'로 드러났다. 미국의 침략전쟁이 늘 그랬다. 상대는 '항복도 하고 폭탄도 뒤집어썼다'. 이런 강압적인 태도는 언제나 보복을 전제로 했다. 기부에서조차 보복을 내걸었다.

'얼음물을 뒤집어쓰며 루게릭병 환자들처럼 근육이 오그라드는 체험을 하자.' 여긴 가학적 심리가 도사려 있다. 루게릭병을 그 따위로 체험하자는 발상부터가 오히려 환자들을 희화화하는 아주 가학적인 짓이다. 게다가 얼음물을 뒤집어쓰는 자들의 고통스런 모습을 보고 즐거움을 얻겠다는 것도 그동안 많아 봐온 가학적 태도들이다. 흔히 방송들이 리얼리티 프로그램을 통해 참가자를 온갖 고통에 빠뜨리며 시청자들한테 즐거움을 주는 전형적인 미국식 가학문화다. 다른 구석이 있다면 이 얼음물 놀이는 교묘하게 사회적 윤리를 들이댔다는 점이다. 그러니 이름으로 먹고사는 연예인이나 정치인 같은 이들한테는 처음부터 피해가기 힘든 족쇄를 채운 놀이였다. 그러다 빌 게이츠니 마크 저커버그가 그 얼음물을 뒤집어쓰면서 온 세상 연예인, 정치인, 기업인들한테는 존재감을 확인하는 놀이터가 되었다. 조지 부시와 리오넬 메시와 같은 유명 인사 반열에 오른다면야 까짓 기부금과 얼음물쯤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오직 중요한 건 이름이 불렸다는 사실이다. 그리하여 영광스럽게 얼음물을 뒤집어썼고 돈도 냈다. 이름이 불리지 않은 자들은 치명타를 입은 셈이다. 이제 그 환상이 보통 시민들 사이에도 번져나가는 모양이다.

'얼음물을 뒤집어쓰라' 이건 대량소비를 바탕에 깔고 낭비를 부추기는 미국식 자본주의 버릇이다. 8월 중순 <워싱턴 포스트>에 따르면 이미 미국에서만 500만갤런(2천만리터)에 이르는 얼음물을 뒤집어썼다고 한다. 지구 인구 6분의 1에 이르는 12억이 마실 물조차 없고 3분의 1에 이르는 28억이 물에 쪼들리고 있다. 유엔 보고서는 한 사람이 하루를 살아가는 데 최소 5갤런이 필요하다고 한다. 500만갤런이면 100만명이 하루 동안 쓸 수 있는 물이다. 이 캠페인은 얼음을 만드는 데 드는 전기를 포함해 엄청난 자원을 허투루 뿌려대는 가진 자들만의 아주 비정한 놀이다. 기부에도 굳이 놀이가 필요하다면 노래를 한 소절씩 부르게 하거나 춤을 추게 할 수도 있지 않겠는가? 남을 괴롭히거나 자원을 버리지 않고도 즐길 만한 일은 온 천지에 깔렸다.

라이스 버킷 챌린지, 러블 버킷 챌린지…

'100달러씩 내라' 대놓고 요구하는 건 미국식 기부문화다. 남몰래 어려운 사람을 돕는 걸 기부라고 배워온 아시아에서는 아주 어색한 풍경이지만 미국에서는 그 반대다. 사회주의 국가에서 정부가 복지를 맡았듯이 미국은 자본 자체가 중요한 사회 안전장치 노릇을 해왔다. 그게 기부다. 기부가 세제 혜택이니 기업 선전을 넘어 자본주의를 유지하는 도구였다. 단 자본이 침해당하지 않는 한도 안에서 벌어지는 일이다. 말하자면 미국에서 기부는 부의 재분배가 아니라 생산비에 포함되는 체제 유지 비용이라는 뜻이다. 그러니 미국에서는 그 기부를 세상에 알리고 인정받는 걸 아주 중요한 일로 여겨왔다. 그게 얼음물 놀이에 담긴 기부 방법이다. 한 해 지구 전체 군사비의 36%에 이르는 680조원을 군대에 쏟아붓는 미국 정부가 제 나라 루게릭병 환자 1만2천여명을 돌보지 못해 이런 캠페인을 벌인다고 의문을 달 필요가 없는 까닭이다.

'얼음물 뒤집어쓴 증거를 소셜네트워크에 올려라.' 얼음물 놀이로 결국 이문을 챙기는 이들은 따로 있다. 페이스북은 이미 3천만회 웃도는 클릭 수를 얻었고 트위터와 유튜브를 비롯한 소셜네트워크들도 난리가 났다. 소셜네트워크의 사회적 순기능이라며 감동하는 이들도 적잖은 모양인데 달리 보면 소셜네트워크는 이런 가학적이고 낭비적인 캠페인을 인도주의로 포장해서 사업적 성공 모델을 확인했을 뿐이다. 앞으로 소셜네트워크는 더 많은 캠페인을 벌이며 인도주의 사업가로 자처하며 자본을 축적해 나갈 게 뻔하다.

그래서 아시아에서 보면 미국을 따라하는 이런 놀이가 딱하고 걱정스러울 수밖에 없다. 그나마 다행스러운 건 저항 기운이다. 굶주린 이들에게 쌀이나 먹을거리를 나눠주자는 인도의 라이스 버킷 챌린지(Rice Bucket Challenge)나 이스라엘 공격으로 파괴당한 파편을 모아 전쟁의 참상을 알리자는 팔레스타인의 러블 버킷 챌린지(Rubble Bucket Challenge) 같은 운동이 튀어나오고 있다는 반가운 소식이다. 비록 이런 소중한 운동들이 아직 세상 눈길을 사로잡지 못해 안타깝지만.

한국도 의문투성이다. 머잖아 가진 자들의 얼음물 놀이는 끝나버릴 텐데 루게릭병 환자들이 다시 외로운 싸움을 벌여야 할 현실을 어떻게 할 것인가? 얼음물 놀이로 루게릭병 단체들이 2억원을 받았다는데 이걸 기뻐해야 옳은가? 루게릭병 환자 2500명이 다도 아니다. 척수수막류를 비롯한 희귀 난치병을 앓고 있는 1만7천여명이 받을 박탈감은 또 어떻게 할 것인가? 희귀 난치병에서조차 차별을 해야 옳은가?

박근혜는 희귀 난치병 환자를 보살펴라

물론 그 대답은 대통령 박근혜가 들고 있다. 박근혜는 대통령 후보 시절 "암, 심장병, 뇌혈관질환, 희귀성 난치병 치료비를 국가가 전액 부담하겠다"고 가는 곳마다 소리쳤다. 박근혜는 대통령이 되었다. 이제 대통령이 약속만 지키면 된다. 그러면 한국에서는 얼음물 따위를 뒤집어쓰며 난리를 피울 일도 없다. 세계 15위 경제대국이라고 떠들어대는 정부가 희귀 난치병 환자 2만여명을 보살피지 못한다면 말이 안 된다. 시민은 그때도 지금도 꼬박꼬박 세금을 내고 있다. 근데 이제 와서 박근혜 정부는 예산타령을 하며 본 척도 않는다. 애초 계산이 틀렸다면 바보고 알고도 약속했다면 사기다. 시민은 바보나 사기꾼을 대통령으로 뽑은 적이 없다. 이 난리판에 대통령 박근혜는 입도 뻥긋 않는다. 그 박근혜를 대통령으로 만든 정당 대표 김무성이란 자도 얼음물만 뒤집어쓸 줄 알았지 한마디 말이 없다. 부끄러움도 모르는 자들이다.

그사이 언론도 참 비겁했다. 사회적 관심을 촉구한답시고 배우와 정치인을 한없이 팔아먹었을 뿐 본질은 말하지 않았다. 왜 묵묵히 살아온 시민들을 죄인으로 만드는가? 루게릭병에 대한 사회적 무관심을 시민 일반한테 돌려서는 안 된다. 그렇게 전선 없고 타격점 없는 캠페인이 늘 책임져야 할 자들한테 빠져나갈 구멍만 열어줬을 뿐이다.

그래서 세상 모두가 얼음물을 끼얹고 놀더라도 당신들만큼은 놀면 안 된다.

'대통령' '정책입안자들' '입법자들' '의료행정가들'

바로 당신들은 약속대로 루게릭병 같은 희귀 난치병 환자들을 보살펴야 한다. 이게 시민사회의 관심이다. 시민은 무관심했던 적이 없다.

정문태 국제분쟁 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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