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드리포트] 도대체 이 간판은 무엇을 말하려는 걸까

박병일 기자 2014. 9. 20. 09: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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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의 사진은 미국 콜로라도 주 덴버 시의 한 교차로에 세워져 있는 대형 간판을 찍은 겁니다. 상당히 고통스러워 보이는 한 여성이 어두컴컴한 호텔방 침대에 앉아 있고, 그 위에 "초콜릿 바가 당신 휴가를 망치게 하지 마라" (Don't let a candy bar ruin your vacation.)라고 적혀 있습니다. 그 아래 노란색 바탕에 검정 글씨로 이렇게 쓰여 있습니다. "With edibles, start low and go slow." 해석하기가 난해한데, 직역하자면, "먹는 것으로는 낮게 시작해서 천천히 가라."라는 뜻이 됩니다. 도대체 뭔 말일까요? 그리고 이 간판은 무엇을 말하려는 걸까요? 초콜릿 바가 왜 휴가를 망친다는 것인지, 그리고 뭐가 천천히 간다는 걸까요?

저 간판에 붉은 머리를 늘어뜨린 채 이마에 손을 얹고 고통스러워 하는 여성은 뉴욕 타임즈의 유명 칼럼니스트 '모린 다우드'를 상징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더 아리송해지지요? 좀 더 힌트를 드리겠습니다. 콜로라도 주는 최근에 마리화나 그러니까 대마초를 합법화한 주이고 저 간판은 마리화나와 관련된 공익 광고판입니다. 이쯤 되면 대강 감이 잡히실 겁니다. "아~ 마리화나를 멀리하라는 얘기구나"라고 말이죠. 저도 처음에 그렇게 추정했거든요. 하지만 정반대입니다. 이 광고판에 유명 칼럼니스트가 등장하게 된 배경, 그리고 알 듯 말듯한 "낮게 시작해서 천천히 가라 (With edibles, start low and go slow)"의 의미는 오히려 마리화나를 장려하는 내용입니다. 이 간판에 얽힌 사연을 알아보겠습니다.

칼럼니스트 모린 다우드는 콜로라도 주가 마리화나를 합법화한 이후에 그 실태를 취재하려고 올해 초 덴버를 방문했습니다. 그리고 직접 마리화나를 경험해 보기로 했습니다. 담배를 피우지 않기 때문에 '먹는 마리화나' (대마초 잎을 갈아 만든 가루를 넣은 초콜릿 바)를 먹었습니다. 그 경험을 지난 6월 뉴욕 타임스에 칼럼으로 올렸습니다. "(그걸 먹고 나자) 온 몸과 뇌가 떨렸다. 침대로 가까스로 기어가서 앉았다. 여덟 시간 동안이나 심한 환각에 빠졌다. 심하게 목이 말랐다. 전등을 끌 수도 없었고 물을 가지러 갈 수도 없었다. 숨이 헐떡거리고 피해망상 증상도 나타났다. 분명히 룸 서비스가 호텔 방문을 노크하는 소리가 들리는데도 대답조차 할 수 없었다. 결국 그 룸 서비스가 경찰에 신고했고 난 체포됐다."

이 칼럼이 보도되고 난 뒤 미국 전역에서 큰 반향을 일으켰습니다. 대체로 마리화나의 심각한 위험성을 지적했다는 긍정적인 반응이 많았습니다. 하지만 콜로라도 주를 비롯해 마리화나 찬성론자들의 조롱도 이어졌습니다. "대부분의 미국인처럼, 도우드 양은 TV에서 멍청한 반-마리화나 광고를 많이 본 모양이군요. 먹는 마리화나를 어떻게 복용해야 하는지를 모르고 한 바보 같은 짓이었어요." 'Marijuana Policy Project' 라는 마리화나 찬성단체의 대변인 메이슨 티버트의 반론입니다.

이 칼럼이 나간 뒤 'Marijuana Policy Project'는 앞서 말한 대형 입간판을 세우기로 결정했습니다. 그리고 그 모델로 칼럼니스트 도우드를 닮은 사람을 뽑았습니다. 이 단체가 이 간판을 세운 배경입니다. 그러니까 그 간판은 마리화나를 먹지 말라는 광고가 아니라 오히려 마리화나를 장려하는 광고였던 겁니다. "만일 마리화나를 담배로 피우게 되면 당신의 뇌는 즉각적으로 반응합니다. 그 효과는 매우 빠르게 시작됩니다. 하지만 먹는 마리화나는 바로 효과가 나타나지 않고 한 두 시간이 흐른 뒤에야 나타납니다. 효과는 천천히 시작되지만 훨씬 오랫동안 지속됩니다." 이쯤 되면 앞서 의문으로 던졌던 With edibles, start low and go slow의 의미가 선명해집니다. 즉 먹는 마리화나는 효과는 천천히 시작되지만 오래간다는 뜻입니다.

이 광고판에 대해 칼럼니스트 도우드의 반응은 어땠을까요? "오~ 재미있는데요. 제 크리스마스 카드에 넣어야겠어요. 근데, 간판에 나온 호텔방은 제가 묵었던 곳보다는 훨씬 깨끗하게 나왔네요." 발끈하지 않고 오히려 웃으면서 능청스럽게 되받아 치는 여유가 엿보입니다. 여하튼 콜로라도 주는 이 칼럼 이후 먹는 마리화나에 대해 엄격한 규정을 도입하려고 하고 있습니다. 즉 한 알에 10밀리그램 이상의 THC 즉 환각 성분이 들어가지 않게 하겠다는 겁니다.

콜로라도 주의 마리화나 합법화는 올해 초 미국의 여러 언론들을 뜨겁게 달군 이슈였습니다. 마리화나를 화분에 담아서 파는 가게에 주지사가 1호 방문자로 나서서 마리화나를 사는 모습이 보도되기도 했습니다. (화분을 사서는 다른 사람을 줬다고 합니다) 찬반 양론이 들끓었습니다. 주 정부의 재정 수입을 늘리기 위해 마리화나를 악용하고 있다는 비난이 나왔는가 하면, 마리화나는 일반 마약과 달리 중독성이 없다며 담배 판매와 뭐가 다르냐는 찬성 여론도 있었습니다. 저는 보수적인 성향이라 그런지, 백 보 양보해서 생각해봐도 찬성론자들의 주장이 궤변처럼 들립니다. 담배도 점점 설 곳이 없어지는 마당에 마리화나를 기호식품의 하나라면서 외부의 관광객을 콜로라도 주로 끌어들이려는 얄팍한 잔꾀로밖에 느껴지지 않습니다. 어쩌면 그런 이유 때문에 미국에서도 도우드의 칼럼에 더 공감하는 사람이 많은 것이고, 그런 세간의 여론 때문에 '마리화나 동조 단체인 'Marijuana Policy Project'도 마리화나를 마구 찬양하는 것이 아닌 저렇게 헷갈리는 광고판을 세울 수밖에 없었던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박병일 기자 cokkiri@s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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