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문재의 크로스로드]그리스인의 명예

정문재 2015. 7. 21. 06: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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빚을 갚지 못하면 불명예로 간주채무자를 모질게 처벌토록 규정많은 부채를 지면 자율성도 잃어언제나 재정 건전성을 유지해야

【서울=뉴시스】정문재 부국장 겸 산업부장 = 고대 그리스 크레타에서는 다른 사람으로부터 돈을 빌릴 때 특이한 관행을 고수했다. 빌려주는 사람의 지갑에서 돈을 낚아채는 시늉을 했다. 만약 돈을 갚지 못하면 '폭력' 혐의까지 추가됐다. 요즘 말로 하면 형법까지 적용해 무거운 처벌을 내렸다는 얘기다.

고대 그리스인들은 명예를 중시했다. 신용은 곧 명예다. 약속을 지키지 않는 한 신용은 얻을 수 없다. 그래서 빚을 갚지 못해도 명예를 저버린 짓으로 간주했다.

이런 엄격한 믿음은 많은 마찰음을 일으켰다. 빚을 갚지 못하는 상황이 속출했지만 가혹한 제재를 가했기 때문이다. 특히 경제적 번영을 누릴 때 부채 문제는 심각한 계층 갈등을 불러일으켰다.

고대 그리스는 BC 6세기에 황금기를 맞았다. 해상 교역 확대를 통해 경제적 풍요를 누렸다. 도시국가들은 예외 없이 독자적으로 주화를 발행하기 시작했다. 교역이 활발해진 만큼 결제 수단의 필요성도 높아졌기 때문이다.

경제 성장과 함께 빈부격차도 확대됐다. 상인들이 무역을 통해 부(富)를 크게 축적한 반면 농민들은 늘 빈곤에 시달렸다. 특히 흉년이 닥치면 상당수 농민들은 자신의 땅을 잃고 소작농으로 전락했다.

소작농은 그나마 행복한 축에 속했다. 많은 농민들이 채무 노예 신세를 피할 수 없었다. 고대 그리스에서는 다양한 방식으로 노예를 충원했다. 자유인이라도 전쟁 포로, 범죄자, 채무자로 전락하면 노예로 팔렸다.

예나 지금이나 빚을 낼 때는 담보물을 제공한다. 고대 사회에서는 주로 곡물, 가구, 가축 등을 담보로 제공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논밭, 집 등으로 담보물이 확대됐다. 나중에는 채무자 본인은 물론 가족을 담보로 제시했다.

빚을 갚지 못하면 채무자와 그의 가족은 채무노예로서 노동력을 제공했다. 이들은 평생 노예 신세를 벗어나지 못했다. 빚을 갚으면 자유인 신분을 되찾을 수 있었다. 하지만 현실적으로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인류 최초의 성문법 드라콘법(法)도 채무노예 규정을 담고 있다. 드라콘은 아테네 최초의 입법가다. 그는 구전(口傳) 율법을 성문법으로 대체하는 한편 죄형법정주의(罪刑法定主義)를 도입했다. 법을 자의적으로 해석하거나 적용하는 것을 차단했다.

드라콘법은 아주 가혹했다. 심지어 양배추를 훔쳐도 사형 판결을 내렸다. 드라콘은 "경미한 범죄에 대해 관용을 베풀 경우 중범죄를 양산하게 된다"고 합리화했다.

드라콘법은 채무불이행에 대해서도 무거운 처벌을 내렸다. 채무자가 채권자보다 신분이 낮을 경우 돈을 갚지 못하면 채권자의 노예로 전락했다. 반면 채무자의 신분이 높으면 관대한 처분을 내렸다. 드라콘법은 채무노예를 크게 늘렸다.

채무노예 증가는 사회 불안으로 이어졌다. 채무 노예의 해방, 농지 재분배 등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높아졌다. 그리스 남서부 도시국가 메가라(Megara)에서는 급진파가 정권을 장악한 후 대출 행위 자체를 불법으로 선언했다. 집권층은 과거에 돈을 빌려주고 받은 이자도 전액 돌려주도록 명령을 내렸다.

아테네도 개혁을 외면하지 않았다. 이른바 '솔론의 개혁'이다. 솔론은 살인죄 관련 규정을 제외한 나머지 범죄에 대해서는 드라콘법을 폐기했다. 빚 때문에 빼앗긴 토지를 돌려주고, 채무노예를 해방했다.

채무노예 문제 재발을 막기 위한 노력도 병행했다. 적극적인 성장전략을 추구했다. 해외 식민지 개척에 박차를 가했다. 저소득층 자녀를 해외 식민지 건설에 투입했다. 적극적인 해외 확장 정책에 힘입어 지중해 및 흑해 연안 곳곳에 식민지를 세웠다. 동쪽 끝 크림반도는 물론 지중해 서쪽 마르세유에도 해외 거점을 만들었다.

그리스가 다시 빚더미 신세로 전락했다. 채권단은 국유재산을 팔아 빚을 갚으라고 몰아세우고 있다. 고대의 채무노예 신세나 다를 게 없다. 탈세 및 부정부패가 만연한 상황에서 막대한 부채 부담은 저소득층을 더욱 힘겹게 만든다.

빚쟁이는 언제나 고달프다. 자신의 운명을 결정하기도 어렵다. 채권자의 요구에 이리저리 휘둘린다. 자율성을 상실했다는 점에서 노예나 마찬가지다. 개인이나 국가나 반드시 재정건전성을 확보해야 할 이유다. 감당키 어려운 빚은 언제나 피눈물을 낳는다. 그리스는 명예를 상실한 대가를 톡톡히 치르고 있다.

참고문헌1) Graeber, David. 2011. Debt : The First 5,000 Years. New York : Melvillehouse.2) Dracon - WIKIPEDIA, The Free Encyclopedia3) Solon - WIKIPEDIA, The Free Encycloped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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