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문재의 크로스로드]르네상스를 낳은 경쟁

정문재 2015. 5. 26. 06: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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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이 공정하고 투명할 때는참여자의 승복과 노력 이끌어경쟁의 기준과 원칙 훼손하면불신과 냉소 전염병처럼 번져

【서울=뉴시스】정문재 부국장 겸 산업부장 = 브루넬레스키는 눈물을 삼켰다. 우승을 기대했지만 결선에서 한 살 어린 경쟁자에게 무릎을 꿇고 말았다. 눈물은 헛되지 않았다. 르네상스 최고의 건축가를 만든 밑거름이었다.

피렌체 직물조합은 1401년 성 요한 세례당의 청동문 제작을 위해 공모를 진행했다. 공모 자체가 파격이었다. 종교 예술은 배타성과 보수성을 특징으로 한다. 검증되지 않은 장인(匠人)에게는 절대로 일을 맡기지 않는다. 그래서 미술사학자들은 이 때를 르네상스의 원년으로 친다.

청동문은 하나님의 은총을 구하기 위한 상징이었다. 페스트가 1400년 또 다시 피렌체를 덮쳤다. 피렌체는 불과 반세기 전에 페스트로 10명의 시민 가운데 8명을 잃었다. 악몽 같은 기억이 아직도 생생했다.

직물업자들은 피렌체의 돈줄을 쥐고 있었다. 사회적 책임을 다해야 했다. 시민들은 하나님을 위한 봉헌(奉獻)을 요구했다. 하나님의 은총으로 페스트를 이겨내야 했다. 은총을 얻으려면 뭔가 새로운 것을 시도해야 한다고 믿었다. 공모는 그런 고민의 결과였다.

모두 7명의 조각가들이 공모에 참여했다. 직물조합은 지원자들에게 일정한 양의 청동을 나눠준 후 구약성서 창세기에 나오는 '이삭의 희생'을 주제로 작품을 만들어 제출하라고 지시했다.

지오반니 메디치를 비롯한 심사위원단은 두 명의 신출내기를 결선에 올렸다. 로렌초 기베르티와 필리포 브루넬레스키였다. 기베르티는 22살, 브루넬레스키는 23살이었다. 이들은 5명의 지원자들과는 달랐다. 중세 고딕 양식에서 탈피한 작품을 선보였다. 둘 다 어릴 때부터 금 세공 작업장에서 실력을 쌓았다.

심사위원단은 격론 끝에 기베르티를 당선자로 확정했다. 브루넬레스키는 심사 결과를 수용할 수 없었다. 스스로를 '최고의 장인'이라고 자부했다. 자부심은 무참히 부서졌다. 그는 "다시는 조각에 손을 대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브루넬레스키는 로마로 떠났다. 기분 전환을 위한 외유(外遊)는 아니었다. 로마 유학(留學)이었다. 판테온을 비롯해 고대 로마 건축을 깊이 공부했다. 로마 유적을 통해 건축물의 물리학적 구조를 연구했다

브루넬레스키가 건축가로서 실력을 뽐낼 기회가 찾아왔다. 피렌체는 1418년 세기적 공모를 결정했다. 바로 산타 마리아 델 피오레 대성당(피렌체 두오모)의 돔 건설 공사였다.

피렌체 두오모는 1296년 착공됐지만 규모가 너무 커서 공사에 어려움을 겪었다. 거의 모든 공사를 마무리했지만 가장 큰 난관이 남아 있었다. 바로 '돔'이었다. 돔의 지름만 무려 44미터에 달했다. 섣불리 공사를 진행하다간 천장부터 무너져 내릴 게 뻔했다.

12명의 지원자가 공모에 참여했다. 브루넬레스키는 판테온 유적 연구 결과를 바탕으로 새로운 공법을 제시했다. 이번에도 브루넬레스키와 기베르티가 결선에 올랐다. 심사위원단은 최종 당선자로 브루넬레스키를 선정했지만 기베르티와 공동으로 작업하라고 지시했다.

그는 속이 상했지만 공사를 시작했다. 돔 벽체 공사가 어느 정도 진행되자 브루넬레스키는 돌연 작업을 중단했다. 와병을 이유로 칩거했다. 기베르티는 총책임을 떠맡았지만 두 손을 들고 말았다. 그는 건축가로서는 브루넬레스키를 따라갈 수 없었다.

브루넬레스키는 재량권을 확보하자 마음껏 재능을 펼쳤다. 우산살처럼 24개의 석재 뼈대를 세우면서 서로 동여매듯 수평으로 연결했다. 돔 자체가 밖으로 벌어지지 않도록 만든 설계 방식이다. 400만 장 이상의 벽돌을 'ㄱ'자와 'ㄴ'자처럼 수평과 수직으로 서로 겹치도록 쌓아 벽체가 스스로 무게를 지탱하도록 만들었다.

그는 1435년 돔을 완성했다. 16년간 공사를 진행했지만 큰 사고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는 1446년 69세의 나이로 눈을 감았다. 그는 피렌체 두오모에 안장됐다. 피렌체가 위대한 건축가에게 바친 최고의 헌사였다.

경쟁은 발전을 촉진한다. 보다 뛰어난 성과를 이끌어 낼 수 있도록 동기를 부여한다. 경쟁의 핵심은 '공정'과 '투명성'이다. 그래야 참여자들이 결과에 승복한 후 보다 높은 목표를 위해 신발 끈을 고쳐 맨다.

특정 대학교 수시모집 전형에서 남학생과 여학생의 합격자 비율을 조정했다는 의혹이 일고 있다. 사실이라면 심각한 위기다. 경쟁은 기준과 원칙을 지켜야 한다. 그렇지 못하면 게임 자체가 성립될 수 없다.

결과가 뻔한 게임은 위험하다. 노력을 위한 동기를 제거한다. 냉소만이 판을 치게 된다. 사회 발전은 기대할 수조차 없다. 대다수가 결과에 승복하지 않게 된다. 불신이 전염병처럼 퍼져나간다. 공정하고, 투명한 경쟁만이 브루넬레스키와 르네상스를 낳는다.

도움말 주신 분미술사학자 노성두

참고문헌1) 정태남 지음. 이탈리아 도시기행. 2012. 21세기북스2) Filippo Brunelleschi - Wikipedia, the free encycloped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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