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파일] 사장은 유령회사.. 계열사에 수상한 자문료 보내는 효성

최우철 기자 2014. 8. 23. 09:45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효성 오너 일가의 회사 자금 빼돌리기 의혹 2

2010년 5월 일본인 여성 O씨는 기다리던 문서가 도착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것이다. 당시 그녀의 서류상 주소지는 일본 치바현. 홍콩 세무국에 회사 설립 서류와, 등록 수수료 1,250 홍콩 달러(약 16만 원)를 내고 기다린 지 엿새 정도 흐른 뒤였다. 전화는 홍콩 비서회사 직원으로부터 걸려왔을 가능성이 크다. 이 직원은 홍콩 공사주책서가 발행한 등기 증서를 보고, 회사 설립이 끝났다고 통보해 줬을 것이다.

갓 설립된 회사 이름은 Ultimatum Limited. '최후통첩'이란 뜻이다. 비장한 이름과 어울리지 않게, 이 회사가 했다는 일은 경영자문이었다. 홍콩 최고 번화가인 침사추이가 주소지다. 설립 다음달부터 2011년 5월까지 그녀의 회사엔 다달이 돈이 송금된다. 보낸 이는 효성그룹의 주력 계열사 노틸러스효성. 월 자문료는 미화 2만 5천 달러였다. 나중에 드러난 자문 내역은 '중국과 글로벌 경영자문'이었다.

일본에서 홍콩으로 출퇴근하는 CEO가 얼마나 될까. 설립 서류와 자문 내역만 보자면, 한국 재벌기업 계열사가 홍콩에 사무실만 차려둔 일본인에게 중국 경영자문을 구한 것이다. 송금이 끝나고 5개월 뒤, 그룹 지주회사격인 효성 감사팀은 '관계회사 부당 지원' 목록에 이 내용을 넣었다.

SBS 탐사보도팀은 홍콩 침사추이 주소지에서 자문사 '최후통첩'을 찾기로 했다. 해당 사무실은 2007년부터 잉크 회사 홍콩지사로 쓰이다가, 작년부턴 화장품 유통업체 사무실이 들었다. 기자의 요청을 받고 입점일지를 살펴본 관리인은 3시간 뒤 전화를 걸어왔다. 투자 자문사가 입점한 적이 없다는 대답이었다. 효성 계열사의 돈이 간 곳은 서류에만 존재하는 페이퍼컴퍼니 즉, 유령회사였다.

취재팀은 효성그룹에 이 회사를 어떻게 소개받았는지 물었다. '최후통첩'에 앞서 자문을 받던 회사가 1곳 더 있었다고 했다. 이 회사 대표이던 일본인 H 씨로부터 '최후통첩'의 대표 O 씨를 소개받았다는 답변이 돌아왔다. 등기 서류 확인결과, H 씨는 2008년 1월부터 2010년 3월까지 모체 격인 자문회사를 운영한 인물이었다. 회사 이름은 Esperance (HK) Limited. 프랑스어로 '희망'이란 뜻이다. '희망'에서 '최후통첩'으로 자문료는 옮겨갔다.

일본에 산 걸로 신고된 O씨와 달리, H씨는 2012년부턴 홍콩 몽콕을 거주지로 삼고 있었다. 일본 도쿄에서 살다 홍콩으로 이사. 서류상으론 그랬다. 이 주소로 찾아갔지만 그는 없었다. 아니, 처음부터 살 수 없었던 곳이다. 사무실 전용 빌딩이었던 것이다.

그가 주거지로 신고한 5층 사무실을 찾았다. 중국인 회계사 사무실이었다. 직원은 그를 기억했다. H씨가 회계사의 '고객'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H 씨는 거물급 고객은 아니었다. "업무를 본 적은 없다. 하지만, 이곳 우편함만 빌렸다." 우편함 대여 고객이었다는 거다. 1년에 얼마였나. 그녀는 시세를 얘기했다. "보통 1,000홍콩 달러(약 13만 원)를 받는다." H 씨 역시 마찬가지였다. 1년 간 우편함을 빌려놓고 여기 산다고 신고한 거였다. 사무실도, 대표 거주지도 서류 속에서만 자문을 해 주는 유령회사였다.

일본인 H씨가 대표인 '희망'은 노틸러스효성이 맨 처음 '중국 글로벌 자문'을 한 회사다. 8억 1천만 원을 받았다. 효성그룹 측은 "정상적인 경영자문 대가로 송금했다"라고 주장했다. 또, "이 일본인은 IT 전문가이며, 그가 원하는 방식을 따라서 자문 계약을 체결한 것이며, 유령회사라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라고 밝혔다.

우리는 그러나 효성과 연관성이 클 거라는 의심을 거둘 수 없었다. 효성이나 조현준 사장과 관계가 없냐는 질문엔 "그룹과 무관한 외부 자문사"라는 답변이 돌아왔다. 자문사 '희망'의 설립부터 파헤쳐보는 수밖에 없었다.

Esperance (HK) Limited. 라는 이름이 홍콩 세무당국 DB에 처음 등장한 건, 2005년 6월 3일이었다. 하지만, 회사 설립은 2년 전인 2003년 11월 19일이었다. 설립 당시 회사이름은 Time Commerce (HK) Limited. 한자로는 '시대상사유한회사'였다. '시대상사'의 설립자는 2명이었다. H씨 그리고 조현준 효성 사장이었다. 효성그룹의 지주회사격인 효성 사장이 설립한 회사로 계열사 자금이 들어간 것이다. 4년 간 11억 원 넘는 회사 자문료 명목이었다. '시대상사' 역시 서류로나 현지 확인 결과나 실체가 없긴 매한가지였다.

'시대상사'는 왜 자문사 '희망'이 됐을까. 조현준 사장은 왜 이런 회사를 만들었고, 돌연 대표 자리에서 물러난 걸까. 서울 성북구 자택을 찾아 직접 이유를 확인하려했지만, 그를 만날 수 없었다.

2003년 설립된 '시대상사'는 자본금 10,000 홍콩 달러(약 130만 원)로 설립된 회사였다. 조현준 사장은 지분 절반을 보유한 공동설립자다. 2004년 12월 31일 조 사장은 일본인 H 씨에게 지분을 모두 넘긴다. 반년 뒤인 2005년 6월 3일, '시대상사'란 이름을 '희망'으로 바꾼다. 이렇게 H씨는 이 회사 대표가 됐다. 효성그룹 측은 H씨가 조 사장이 사업을 하면서 알게 된 지인이라고 밝혔다. 조현준 사장은 홍콩에 회사를 세운 뒤, 지분을 모두 넘겼고 회사이름이 바뀌었다. 명목상 조 사장과 무관한 회사가 된 뒤로, 이 회사는 갑자기 '자문사'로 활동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계열사 돈이 송금되기 시작한 것이다.

일본인 H 씨는 어떤 인물일까. 효성그룹은 "이 일본인은 IT 전문가이며, 그가 원하는 방식을 따라서 자문 계약을 체결한 것이며, 유령회사라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이 회사 설립자는 바로 조현준 사장이다. 앞뒤가 맞지 않는 해명이다.

우리는 미국 회사 등기 서류에서 H 씨의 이름을 발견할 수 있었다. 2012년부터 그는 미국 캘리포니아 P사의 대표를 맡고 있다. 이 회사는 조현준 효성 사장이 징역형을 확정 받은 미국 불법 부동산을 관리하는 회사다. 단순한 지인 관계라는 말을 그대로 믿기 힘든 대목이다.

2010년 7월, 조현준 사장은 횡령 혐의로 재판에 부쳐진 상태였다. 당시 검찰 수사에서, 그는 효성 미국 법인인 효성아메리카 자금으로 별장을 사들인 혐의를 받고 있었다. 1심 재판을 받던 2010년 하반기, 효성 계열사는 홍콩의 유령회사로 수상한 자문료를 송금하고 있었다. 회사 돈을 개인 돈처럼 쓴 혐의로 재판을 받으면서도, 똑같은 오해를 살만한 송금 내역이 새롭게 드러난 것이다.

올해 1월 검찰은 5개월에 걸친 효성 오너 일가의 기업범죄 수사결과를 공개했다. 2008년부터 비자금 조성과 횡령 혐의로 수차례 재판을 받아온 조석래, 조현준 부자의 공소사실은 충격적이었다.

해외비자금 조성은 5가지, 국내비자금은 2가지 수법으로 조성됐다. 조석래 회장은 홍콩 등지에 유령회사만 5개를 설립한 걸로 조사됐다. 여기에 회사 돈을 빌려주고 채무를 없앤 뒤, 자기 스위스은행 계좌로 넣는 등의 수법을 썼다. 조세포탈 액수는 무려 1,506억 원에 달했다. 회사 돈 횡령 액수는 690억 원, 손해를 끼친 배임액은 233억 원으로 드러났다. 당시 조현준 효성 사장 역시 조세포탈과 횡령 혐의로 기소됐다. 법인카드를 사적으로 사용한 게 문제가 됐다. 법인 자금으로 결제된 액수만 16억 원에 달한다.

효성 계열사는 홍콩 유령회사 2곳에 11억 대 자문료를 보냈다. 이 회사는 효성 사장이 설립한 회사였다. 자문사 CEO는 미국 불법 부동산 관리인으로 일하고 있다. 하지만, H씨가 정당한 자문료를 받았다는 효성 측 주장을 받아들인다고 해도 의혹은 사라지지 않는다.

H씨는 2008년 처음 자문료를 받던 당시 홍콩 유령회사 대표직만 맡고 있던 게 아니었다. 당시 그는 조현준 사장이 대표이사인 효성 계열사 G사의 등기임원이었다. 효성은 "IT 전문가인 그의 이력을 믿고 자문료를 보내준 거였다"라고 해명했다. 그렇다면 굳이 홍콩 유령회사로 송금해야 할 이유는 설득력이 떨어진다. 등기임원인 H씨에게 직접 자문을 받고 자문료를 주는 것이 상식적인 경영이기 때문이다.

취재 결과, 지난 16일 SBS 8뉴스와 시사보도프로그램 뉴스토리(매주 화요일 8시 55분 방송)보도가 있기 전까지 검찰은 그동안 조현준 효성 사장의 유령회사 설립 사실을 확인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곳으로 자문료가 다달이 나간 사실 역시 수사하지 못했다.

검찰은 지난 1월 효성 오너 일가를 재판에 부치면서, 방대하고 지능적인 기업 범죄를 다각적으로 밝혀냈다고 자평했다. '이익은 총수에게, 손실은 회사에게' 몰아주는 관행을 엄단했다고 큰소리쳤다. 효성일가의 기업범죄가 드러날 때마다, 처벌 수위를 결정한 법의 잣대가 공정했는지 되묻는 여론이 많았다. 검찰이 새롭게 드러난 의혹을 철저히 수사하는지 지켜볼 일이다.

최우철 기자 justrue1@sbs.co.kr

Copyright © Copyright ⓒ SBS.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 재배포 및 AI학습 이용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