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파일] 중국은 왜 스스로 치부를 드러냈을까?

권종오 기자 2014. 8. 21. 1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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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8월 12일 중국 산둥성 웨이하이에서 인천 아시안게임 성화 봉송 행사가 열렸습니다. 웨이하이는 한국에서 지리적으로 가장 가까운 중국의 도시이자 인천의 우호협력 도시이기도 합니다. 웨이하이 시의 초청으로 한국 기자단 16명이 현지에서 성화 봉송행사를 취재했습니다.

한국 기자단이 웨이하이에 도착한 것은 성화 봉송행사 하루 전인 11일 오전이었습니다. 모두들 피곤해 오후에 잠시 쉬고 싶었는데 웨이하이 시는 기자단에게 '류궁다오(劉公島)'로 간다고 통보했습니다. '류궁다오'는 웨이하이 부두에서 배로 20분 거리에 있는 섬입니다. 한국 기자단은 내키지는 않았지만 주최측의 요청을 무시하는 것도 예의가 아닌 것 같아 가볍게 섬이나 둘러보자는 생각에 배에 올라탔습니다.

한국 기자단이 내린 곳은 '중국 갑오전쟁 박물관'이었습니다. '갑오전쟁'은 갑오년이었던 1894년에 발생한 '청일전쟁'을 말합니다. 이 박물관은 장쩌민 주석이 집권하던 1985년에 개관했는데 '청일전쟁' 관련 유물 1천여 점이 전시돼 있습니다. '류궁다오'는 청나라 북양함대의 사령부가 있던 곳이었습니다. 1895년 2월 이곳이 일본 군대에 의해 함락되며 청나라는 항복을 선언했고 굴욕적인 '시모노세키 조약'을 맺어야 했습니다.

'시모노세키 조약'의 일본측 대표가 바로 안중근 의사에 의해 처단된 이토 히로부미였습니다. 이 조약으로 청나라는 조선에 대한 지배권을 완전히 상실했고 외국 열강에 의해 반식민지로 전락하는 계기가 됐습니다. 조선에 미친 영향도 엄청났습니다. 일본 세력의 확장에 두려움을 느낀 명성황후는 러시아의 힘을 이용하려다 바로 그해 가을 일본 낭인에 의해 끔찍하게 살해됐고 조선은 망국의 길에 접어들게 됐습니다.

'청일전쟁'은 주지하다시피 동학 항쟁을 진압하려고 조선 정부가 청나라를 끌어들이면서 비롯됐습니다. 청나라 군대가 조선에 진입하자 일본도 '톈진조약'을 악용해 더 많은 군대를 출병시켰고 1894년 7월 '풍도 전투'를 시작으로 전쟁에 돌입하게 됩니다. 이후 '평양 전투', '압록강 전투'에서 패배한 청나라는 본토로 퇴각했고 이듬해 본거지인 '류궁다오'마저 내주며 전멸하고 말았습니다.

'청일전쟁'은 중국 역사에서 최대 치욕으로 평가됩니다. 수 천 년 동안 동아시아의 지배자였던 중국이 힘 한번 쓰지 못하고 일본에 무릎을 꿇었기 때문입니다. 북양함대는 장비가 잘 갖추어져 있었고 근대화된 청나라 군대의 상징이었지만 도덕적 해이와 부패로 무기력하게 무너졌습니다. '변법자강' 운동을 일으킨 강유위의 제자이자 근대 사상가인 양계초는 "중국이 5천년 꿈에서 깨어난 것은 청일전쟁 패배에서 비로소 시작됐다"고 말할 정도로 충격은 컸습니다.

'류궁다오'에 있는 '중국 갑오전쟁 박물관'를 돌아보며 생긴 물음은 이것입니다. 이처럼 치욕적인 패배를 왜 웨이하이 시는 한국 기자단에게 그렇게 보여주고 싶었던 걸까? 섭씨 30도가 넘는 찜통 더위 때문에 한국 기자단이 "그만 보고 싶다"는 뜻을 나타내자 그들은 상당히 못마땅한 표정을 지으며 강행군을 멈추지 않을 정도였습니다. 이것만이 아니었습니다. 한국 기자단이 '류궁다오'를 방문해 둘러보는 것을 현지 중국 취재진은 잠시도 놓치지 않고 카메라에 담았습니다. 게다가 2명의 한국 기자에게 TV 인터뷰도 요구했습니다. 그날 현지 TV 방송은 한국 기자단의 '류궁다오' 방문 사실을 크게 보도했습니다.

웨이하이 시의 의도는 최근 중국 정부가 일관되게 보여준 태도와 일맥상통합니다. 시진핑 주석은 지난 7월 7일 '중일전쟁'의 도화선이 됐던 '노구교 사건' 77주년을 맞아 현장을 방문했는데 기념사에서 '일구(日寇)' 즉 '왜놈'이란 표현까지 쓰며 일본의 과거 만행을 규탄했습니다. 중국은 현재 일본명 센카쿠 열도, 중국명 댜오위다오를 놓고 일본과 첨예한 영토 분쟁을 일으키고 있습니다. '청일전쟁'은 갑오년에 일어났고 올해 2014년도 갑오년입니다.

'청일전쟁' 120주년을 맞아 중국정부는 과거의 치욕을 더 이상 되풀이하지 않겠다며 국민들에게 연일 역사의식을 고취시키고 있습니다. '류궁다오'를 오가는 배안에서까지 '류궁다오는 단순히 하나의 섬이 아니다. 우리 민족의 처절한 투쟁의 역사가 새겨진 곳'이라는 내용의 동영상을 하루 종일 틀고 있습니다. 최근 '류궁다오'를 찾는 중국인들이 지난해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증가한 것도 중국 정부의 이런 노력 덕분입니다. 중국 정부는 중국인들에게 뿐만 아니라 외국인들에게도 자신들의 결연한 의지를 보여주겠다는 생각을 공공연히 드러내고 있습니다. 웨이하이 시가 한국 기자단의 '류궁다오' 행을 그렇게 고집한 것도 바로 이런 데서 연유한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중국 갑오전쟁 박물관'을 관람하면서 저는 중국의 치욕보다는 조선의 치욕이 더 안타까웠습니다. 그 넓은 박물관에 조선과 관련된 내용은 그리 많지 않았습니다. '청일전쟁'의 주된 전투 장소가 조선이었다는 사실을 고려하면 더 납득이 가지 않습니다. 그나마 전시관 안에 사진이 걸린 인물은 고종, 김옥균, 전봉준 3명에 불과합니다. 고종을 '조선국왕 이희'라고 표현하며 "서구 열강의 침입과 국내 계급모순의 격화로 동학항쟁을 유발했다"고 기술했습니다. 김옥균에 대해서는 이름도 표기하지 않고 "일본의 책동으로 갑신정변이 일어났다"고만 적어놓았습니다.

이 전시관에 드러난 조선은 한마디로 무기력하고 존재감 없는 '작은 나라'에 불과했습니다. '동북공정' 논란이 말해주듯 중국인들의 역사관에는 문제가 많습니다. 하지만 그들에게 배울 것도 분명히 있습니다. 치욕적인 과거의 전철을 결코 반복하지 않겠다는 철저한 국가 의식, 민족의식이 바로 그것입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역사를 망각하는 민족은 미래가 없기 때문입니다.

권종오 기자 kjo@s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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