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파일] 내 입맛을 미생물들이 조종한다고?

이상엽 기자 2014. 8. 19. 16:27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신호전달물질 통해 메뉴 선택에 영향 미쳐

'어제는 기름진 삼겹살이 먹고 싶었고, 오늘은 왠지 얼큰한 찌개가 당기는데'

'오늘따라 달콤한 슈크림이 자꾸 생각나는 거야'

매일 우리는 입맛 당기는 음식을 골라 먹으려고 합니다. 점심 메뉴를 정하는 선택의 문제 앞에 서서 한참을 고민할 때도 있죠. 하지만 무엇이 내 입맛을 이렇게 좌우하는지 깊이 생각해 본 적은 많지 않습니다. 그냥 먹고 싶으니까, 입에 당기니까, 이렇게 생각하고 메뉴판을 뒤적입니다.

그런데 만약 내가 먹고 싶은 음식이 사실 내가 아닌 내 뱃속의 미생물들이 고른 것이라면 어떨까요? 이게 무슨 소린가, 하겠지만 사실은 그럴 가능성이 상당히 높다는 연구결과가 나왔습니다.

미국 샌프란시스코 캘리포니아 주립대학과 애리조나 주립대, 뉴멕시코 주립대 공동 연구팀은 최근 학술지 'BioEssays'에 실은 논문에서 몸속 미생물들이 우리의 식습관과 선호 식단에 영향을 미친다고 밝혔습니다. 결론부터 요약하면, 우리 위와 장 속에 사는 미생물들이 각자 최적의 생육 환경을 구축하기 위해 자신들이 선호하는 영양소를 소비하도록 우리를 유도한다는 겁니다. 뱃속의 미생물들이라고 해서 주는 대로 받아먹는 녀석들이 아니라는 얘깁니다. 하지만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한 걸까요?

인간의 소화관 속에 사는 미생물들은 숫자도 많지만 그 종류가 대단히 방대합니다. 어떤 세균은 달콤한 당분을 좋아하고, 어떤 세균은 지방을 선호합니다. 이것저것 아무거나 다 먹는 잡식성은 없습니다. 대부분이 어느 특정한 종류의 영양소를 훨씬 더 선호하는 경향을 보입니다.

그런 미생물들에게 우리의 소화관은 일종의 작은 우주와도 같은 생태계입니다. 때가 되면 영양분 가득한 음식물이 잘게 부서져서 내려오는데, 이 음식물을 놓고 복잡하고 처절한 생존투쟁이 벌어집니다. 왕성한 식욕과 번식속도로 음식물을 먹어치우는 세균도 있고, 남들은 잘 안 먹는 영양소, 즉 일종의 틈새시장을 공략하는 녀석도 있습니다.

연구팀은 최근 발표된 연구 성과를 종합해, 이 다양한 미생물들로 이뤄진 집단이 우리 몸에 일종의 신호전달 물질을 분비해서 특정 음식을 선호하도록 만드는 자극을 준다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예컨대 지방을 선호하는 미생물의 신호전달 물질이 강하게 전달되면, 우리 몸속에서도 기름진 음식이 필요하다는 신호가 뇌로 전달되고, 결국 그날은 기름진 음식을 먹게 될 가능성이 높아지게 됩니다.

좀 더 구체적인 메커니즘을 살펴보면 미생물들이 뇌에서 소화관까지 연결된 미주신경을 자극하고, 그 결과 소화관과 연결된 내분비·면역·신경계가 미생물의 신호를 받아 우리의 결정에 영향을 미치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를테면 '달콤한 케이크가 먹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죠.

심지어 미생물들이 우리가 먹는 음식이 마음에 안 들면 거부반응을 느끼게 만들 수도 있다는 조금 믿기 어려운 연구결과도 있습니다. 애리조나 주립대의 아테나 액티피스 박사는 "미생물들이 미주신경을 통해 맛 수용체를 자극할 때, 우리가 섭취하는 음식의 종류에 따라 기분이 나빠지거나 좋아지게끔 하는 특정 물질을 분비하게 만들 수도 있다"고 밝혔습니다. 이쯤 되면 거의 인간의 입맛을 좌우하는 수준에 가깝습니다.

음식 메뉴를 고른다는 행동은 정말 온전히 나의 의지에만 좌우되는 걸까요? 오늘 먹는 점심은 얼마 전 맛있게 먹은 그 음식의 맛과 향, 식감이 생각나서 또 먹고 싶어 고른 것일 수도 있고, 별 생각 없이 동료들과 같은 메뉴를 고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의식적으로 어떤 음식을 먹어야겠다고 그리 깊이 생각하지 않는다면, 메뉴를 고를 때 몸속 미생물의 '입맛'이 은연중에 개입될 수도 있습니다. '이 음식이 먹고 싶다'는 선택은 어쩌면 순수한 인간의 자유의지에서 비롯된 것이 아닐 지도 모릅니다.

다행한 것은 미생물의 '입맛'을 우리가 바꿀 수도 있다는 점입니다. 미생물들이 끊임없이 우리에게 신호를 보내지만, 인간은 몸속 미생물들에게는 신과 같은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연구팀의 카를로 메일리 박사는 "우리가 24시간만 식단을 바꿔도 몸속 미생물들의 구성에 의미 있는 변화가 일어난다"며 "우리가 먹는 음식의 종류가 이 세균들에게 아주 커다란 변화를 불러올 수 있다"고 설명했습니다. 실제로 일본에서는 미역, 다시마 같은 해조류를 소화하는데 특화된 장내 세균이 발견되기도 했습니다. 해조류를 자주 먹는 사람의 몸속에 적응하기 위해 미생물들이 진화한 결과입니다.

이제 연구팀은 새로운 실험을 계획하고 있습니다. 미역 같은 해조류를 좋아하는 세균을 다른 사람의 소화관으로 이식해 놓으면 그 사람이 해조류를 더 많이 먹게 될 것인지 알아보는 실험입니다. 만약 해조류를 먹지 않던 사람이 세균이 들어온 뒤로 해조류를 더 많이 찾게 된다면 그 사람의 입맛은 세균에게 일정 부분 조종당했다는 증거가 아닐까요.

반대로 저염식이나 저지방식 같은 식단 조절을 꾸준히 계속해 나간다면 처음에는 몸(또는 몸속의 세균)의 저항이 있을지도 모르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입맛도 그에 맞춰지면서 건강을 되찾을 수 있다는 기대를 갖게 합니다.

우리의 식생활은 '내 입맛'을 사이에 두고 세균과 나의 이성이 벌이는 싸움판과 같습니다. '먹고 싶다'는 유혹에 저항하기 어려울 때 '이건 내 의지가 세균의 유혹을 꺾지 못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다이어트에 좀 더 동기부여가 될지도 모르겠습니다.이상엽 기자 science@sbs.co.kr

Copyright © Copyright ⓒ SBS.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 재배포 및 AI학습 이용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