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파일] 보이지 않는 273만 명..많이 좋아졌다는 건 누구 시각인가

심영구 기자 2015. 4. 19. 09: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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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애인의 날'에 대한 어떤 기억

● 2004년 4월 20일

2004년 4월 20일 오후 나는 청와대 앞 분수대 근처에 있었다.

다섯 달 전인 2003년 11월, 청와대 비서실은 장애인 단체와 함께 휠체어를 타고 청와대 주변을 돌아보는 장애인 체험 행사를 열었다. 길과 길이 연결되거나 전환되는 곳마다 '턱'이 있었고 휠체어를 타고 지나가긴 쉽지 않았다. 한 수석비서관은 이런 턱을 없애겠노라고 공개적으로 약속했다.

나는 이날 휠체어를 탄 지체장애인 한 분과 함께, 이 약속이 제대로 지켜졌는지 점검하러 왔다. 분수대 주변의 고작 백여 미터 남짓한 구간이었지만 휠체어 타고 이동하긴 쉽지 않았다. 곳곳에 걸리는 턱 투성이였다. 고작해야 5~10센티미터 높이의 턱이었지만 혼자 지나갈 순 없었다. 그런 내용들을 담아 당일 기사로 썼다. 제목은 <청와대도 안 고쳤다>, 입사한 지 6개월 조금 지나 메인뉴스에 처음으로 기사를 쓴, 이른바 '입봉작'이었다.

(당시 뉴스 보기 ▶ 청와대, 장애인 시설 약속 불이행)

● '차별금지법'까지 제정됐던 그때

'장애인의 날'을 계기로 한 기획이긴 했으나, '장애인 이동권'보다는 '청와대 비판'에 더 무게가 실렸다. '휠체어 탄 장애인이 몇 명이나 청와대 주변에 올라고...' 하는 생각을 나도 조금은 했다. 지금처럼 청와대 앞이 중국인 관광객들을 비롯해 인기 관광코스가 되기 전이라서 더 그랬다. 그래도 첫 기사의 인연 때문이었을까, 그 뒤로 장애인 권리와 관련한 기사를 여럿 썼다. 이를테면 도로 위의 점자유도블럭이 잘못 놓여있거나 엉뚱하게 설치돼 있던 문제라든지, 장애인 편의시설이 제멋대로 설치돼 있다든가 아예 없다든가... 장애인 이동권을 비롯해 권리 문제가 계속 이슈가 되고 주목받던 시기이기도 했다. 장애인복지법을 비롯해 장애인연금법, 활동 지원법, 편의 증진법 등 여러 관련 법들이 있었으나 무엇보다도 2007년에 '장애인차별금지법'이 제정되기도 했다. 그때는 그런 시절이기도 했다.

정권이 바뀌는 시기와 묘하게 겹치기도 하는데, 어쨌든 장애인 관련 기사가 이전보단 덜 다뤄진다. 해마다 '장애인의 날'엔 기획 기사를 마련하지만, 그외 360일 정도에는 그리 비중있게 다루지 않는다.

● 휠체어를 타다…눈 가리고 걷다

11년이 지나 2015년 4월 15일 '장애인의 날'을 닷새 앞두고 국립재활원의 장애인 체험 교육에 참여했다. 하나는 휠체어를 타고 경사로를 비롯, 각종 보도 위의 장애물을 경험하며 다니는, 휠체어 체험이었고 다른 하나는 안대로 눈을 가리고 지팡이에 의지해 길을 걷는 시각장애인 체험이었다. 휠체어를 탄 분을 모시고 주로 실내에서 이동한 경험은 있으나 휠체어를 타고 이렇게 다녀본 건 처음이었다. 11년 전 기자로서의 첫 기사를, 휠체어 탄 장애인의 고충에 대해 썼는데도 말이다.

먼저 경사로, 편의시설 기준에 경사로는 18분의 1, 즉 1미터 높이라면 18미터 길이 이하라는 기울기를 지키도록 돼 있다. 휠체어를 탄 장애인이 혼자 힘으로도 오르내릴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만든 기준이다. 이런 내리막길을 내려가는데도 제법 속도가 났다. 중간 중간 바퀴 손잡이를 잡아 제동을 걸지 않으면 넘어지거나 부딪칠 수 있겠다 싶을 정도였다. 오르막길 역시 꽤 힘이 들었다. 기울기가 더 높다면 혼자서 올라갈 수 있었을까.

다음에 장애물, 환풍구처럼 구멍이 촘촘히 뚫린 길은, 구멍 크기에 따라 바퀴가 끼어 움직이기 힘들었다. 올록볼록 요철이 올라온 길도 크게 덜컹거렸다. 그나마 이런 길은 이동이라도 할 수라도 있었으나 턱이 문제였다. 5센티미터 높이에 불과한데 아무리 용을 써도 올라갈 수가 없었다.(몸이 더 가벼웠다면 가능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은 얼핏 든다.) 기울기가 높은 경사로도 마찬가지였다. 다른 사람이 밀어 올려줘야 겨우 지날 수 있었다. 높은 보도에서 내려갈 때도 문제였다. 11년 전 동행했던 장애인은 당시에 이렇게 말했다.

"솔직히 턱을 보면 무서운 생각이 들죠. 일단 휠체어가 턱에 걸려 넘어지면 저 같으면 얼굴이 먼저 땅에 닿아서 크게 다칠 수 있거든요."

그때는 '그렇다고 한다' 그런 느낌이었는데 내가 직접 타보니 실감할 수 있었다. 그야말로 "높이 5센티미터의 턱이지만 장애인에게는 넘기 힘든 장벽"이었다.

이어서 시각장애인 체험, 체험 전 내가 갈 코스를 눈여겨봐두었다. 보도 바닥의 유도블록을 따라 10미터 정도 걸어간 뒤 방향을 전환해 (가상)버스에 타고 버스에서 내려서 걸어가 신호등이 있는 횡단보도에서 길을 건너면 끝이었다. 길쭉한 선이 그려진 선형 유도블록은 진행하라는 의미, 동그란 점 같은 요철이 있는 점형 블록은 분기나 대기, 시발, 종료, 위험 등을 알리는 의미, 10년 전부터 블록의 의미는 알고 있었다.

그런데 막상 지팡이를 흔들어 짚으면서 출발해보니 짐작과는 달랐다. 구두를 신은 발로는 선과 점을 구분하기 힘들었다. 어디까지가 선형인지, 어디부터 점형인지... 대강 이 정도 오면 버스 정류장이었지 하는 감으로 가야 했다. 간신히 버스까지 탔는데 버스 안에서는 더더욱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지팡이를 흔들면 승객들 몸에 맞기 일쑤여서 함부로 쓸 수도 없었다. 손으로 더듬더듬했는데 혹시 여자승객의 몸이라도 스치는 건 아닌지 걱정돼 그마저도 조심스러웠다.

버스에서 내려 횡단보도를 지날 때는 그나마 있던 유도블록도 없고 방향을 가늠하기 어려웠다. 체험에 나선 다른 기자는 횡단보도를 다 건너지 못했는데 신호가 바뀌어버렸다. 길 한가운데 덩그라니 서 있는 그이의 모습이 아찔했다.재활원 관계자는 "이전보다는 나아졌다지만 그래도 시각장애인이 새로운 길을 다니기는 정말 힘들다. 그분들은 아는 길만 다닌다"고 말했다. 게다가 보도엔 차량 진입을 막기 위한 볼라드도 도처에 있다. 8-9년 전 만났던 어느 시각장애인은 바지를 걷어올려 보여줬더랬다. 온통 상처와 흉터 투성이였다. 길을 나서면 볼라드에 부딪치지 않는 날이 없기 때문에 생긴 것이라 했다. 요즘은 더할 것 같다.

● 보이지 않는 273만 명은 어디에…

2014년 장애인 실태조사 결과에 따르면 국내 장애인 수는 273만 명으로 추정된다. 우리나라 인구 5천만 명의 5%가량이 장애인이다. 그런데 주위에서 장애인은 그렇게 흔하게 보이지 않는다.(언뜻 봐서는 장애인이라고 구분하기 힘든 낮은 등급의 장애인이 좀더 많아서 그럴 수도 있겠다.) 장애발생 원인은 사고 혹은 질환 등 후천적 요인에 의한 비율이 88.9%, 장애인 10명 중 9명은 태어나면서부터가 아니라 교통사고든 어떤 질병 때문이든 후천적인 장애인이 된다든 얘기다. 나도 당신도 남은 생애 동안 장애인이 될 수 있다는 의미다.

장애인 권리가 많이 신장됐고 편의시설이나 기타 환경도 많이 좋아졌다고는 하는데 그런 게 장애를 갖고 있지 않은, 비장애인의 시각에서 '그럴 것이다' 짐작하고 있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4월 20일은 장애인의 날이다.심영구 기자 so5what@s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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