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대중 칼럼] 이제 民生과 安保다

조선일보

안철수 무소속 후보의 퇴장 이후 12·19 대선의 성격은 여(與)와 야(野)의 고전적 대결 구도로 되돌아왔다. 대선의 판도가 달라진 것뿐만 아니라 그동안 대선 주변을 맴돌던 '새 정치'니, '정권 교체'니, '과거 대 미래'니 하는 등의 상징적 표어들도 의미를 상실했다.

안철수씨로 인해 제기됐던 구태(舊態) 정치 청산과 기득권 포기의 쟁점은 새누리당과 민주통합당으로서는 더 이상 거론할 위치에 있지 않다. 그들이 바로 구(舊)질서이고 기득권이기 때문이다. 그들이 아무리 새 정치를 표방하고 약속한들 말장난으로 들릴 뿐이다. 이번 대선에서 '새 정치'는 더 이상 효력을 발휘할 수 없다.

↑ [조선일보]김대중 고문

'정권 교체' 운운도 쟁점이 될 수 없다. 이명박 정권은 형식상 새누리당 정권이지만 새누리당과 남남이 된 지 오래다. 민주당이 '이명박근혜'라는 조어(造語)를 만들어 박근혜를 이 정권과 결부하려 하고 있지만 박근혜 후보와 그의 대선 체제는 MB 정권의 '피해자'로 자처하고 있다. 지금 정권 말기에 일어나고 있는 권력기관의 실정(失政) 사례들은 박 캠프에 악재로 작용하고 있다.

'과거 대(對) 미래'도 현실성이 없다. '안철수'가 없어진 마당에 누가 과거이고 누가 미래인지 헷갈린다. 여야 대결을 ' 박정희 딸과 노무현 비서의 대결'로 보는 경향이 있는데, 굳이 그렇게 보더라도 박정희는 35년 전의 과거이고 노무현은 5년 전 과거다. 좀 더 색깔이 짙은 과거는 노무현이고 과거의 그림자는 문재인 쪽이 더 선명하다.

이런 쟁점이랄까 색깔 칠하기가 현실성이 없고 의미가 약해진 상황에서 우리 유권자의 선택은 이제 고전적 양상으로 되돌아갈 수밖에 없다. 즉 경제와 일자리, 재벌 문제, 안보, 성장과 복지, 삶의 질 향상과 빈부 격차 줄이기 등을 놓고 어느 후보가 이 나라를 더 잘 이끌어 나갈 수 있는가가 선택의 기준이 돼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곧 민생(民生)과 안보(安保)의 문제에서 어느 후보, 어느 정당이 더 적합하게 대처하고 어느 후보가 더 전력투구하느냐의 쟁점으로 귀결한다. 지금 안철수 지지표가 어느 쪽으로 얼마가 이동할 것이냐로 온 정치평론가·언론 매체·여론조사 기관이 매진하고 있지만 그것이 민생과 안보에 매달려야 하는 유권자의 선택을 오도(誤導)하고 시대를 보는 눈을 가리는 우(愚)를 범하지 않았으면 한다.

이제 우리는 두 진영의 실현 가능한 정책과 공약, 그리고 대통령 후보들의 능력과 자질, 즉 용인술(用人術)과 소통력을 보고 표를 던지는 실무정치로 가야 한다. 천안함 사건과 연평도 사태를 보는 시각이 무엇이고, 제주 해군기지를 어떻게 다룰 것이며, 북한·미국·중국 문제에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를 보고 표를 주는 현실적 선택으로 가야 한다. 전 세계적인 경제 위기에 어떻게 살아남을 것이고, 성장과 복지를 어떻게 균형 있게 이뤄나갈 것이며, 양극화 현상은 어떻게 무엇으로 극복해나갈 것인가를 보고 투표해야 한다. 이것이 우리가 살아남는 길이다.

그런 점에서 지난 11월 미국의 대통령 선거는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있다. 공화당은 선거의 초점을 백악관을 흑인 대통령에게서 빼앗아 오는 백인의 자존심에 두고 '오바마를 단임(單任)으로 끝내자'는 기치 아래 선거를 몰아갔다. 그렇게 드러내지는 않았지만 세계가 그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공화당은 패배하고 민주당의 오바마는 재선에 성공했다. 재정 적자, 글로벌 경제, 실업, 기후변화, 테러리즘, 의료보험 등 산적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공화당과 타협할 의사를 밝혀온 오바마를 '인종(人種)과 단임'의 프레임으로 옭아매려 든 것은 공화당의 단견(短見)이었다. 미국 국민은 상징정치보다 현실정치, 캐치프레이즈 정치보다 실무정치에 표를 준 것이다.

'안철수 현상'이 60여년 대한민국 정치 역정에서 처음으로 의미 있는 제3의 기운을 형성했다는 사실을 부정하기 어렵다. 즉 기성정치의 반복적·퇴보적 정치 행태에 경종을 울리고 기득권 세력을 맹목적으로 수용하기를 거부하는 움직임을 단순히 정치적 치킨게임으로 봐서는 안 될 것이다. 하지만 안철수씨가 중도 하차하고 제3의 기운이 주춤하게 된 것은 아직은 새누리당과 민주당 차원에서 처리할 문제들이 남아서 당분간 우선순위가 뒤로 밀린 때문일 것이다.

결과적으로 볼 때 '안철수 퇴장'은 우리에게 '제3의 길'의 가능성을 충분히 보여주면서 그것의 실현은 시기상조라는 역사적 계시였는지도 모른다. 아마도 우리가 이번 대선의 선택을 민생과 안보의 현장에서 가치 지향적으로 치러내고 앞으로 5년 동안 의미 있고 순조로운 진전을 이뤄낸다면 우리의 운신 폭을 넓히는 안철수식 제3의 정치는 비로소 제자리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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