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한혜정 칼럼] 여성 대통령? 아직은 갈 길이 멀다

한겨레

[한겨레] 얼마 전 택시를 탔는데 남성 기사분이 선거 이야기를 꺼내며 "꼭 여성 대통령에게 투표해요. 여자들이 왜 여자에게 투표를 안 하는지 도대체 알 수가 없어"라고 말했다. 며칠 지나지 않아 황상민 교수의 '생식기' 발언으로 한 차례 '여성 대통령' 논란이 일었다. 우연히 텔레비전 토론을 보게 되었는데 토론자들이 모두 남자였다. 그 자리에 왜 여자는 없었으며, 여성주의자를 자처해온 나 역시 왜 그 이슈에 그리 무심했을까 싶어서 생각을 좀 해보기로 했다.

전세계에서 여성으로 대통령이나 총리가 된 이들은 크게 세 부류로 나눌 수 있다. 한 부류는 기성 정치가의 딸이나 아내로 수장이 된 경우인데 주로 '후진국'에서, 혹은 혼란 정국에 탄생한 인물들이다. 1966년 인도 총리가 된 인디라 간디나 1974년 아르헨티나 대통령이 된 이사벨 페론이 대표적 사례일 것이다. 흥미로운 점은 인도나 아시아의 경우는 딸, 남미의 경우는 아내가 주로 자리를 물려받았다는 점이다. 아시아의 경우, 식민지 치하에서 독립운동에 투신한 가문에서 자란 딸이 정치계에 입문한 경우가 주를 이루고 혼란한 정국의 남미나 필리핀에서는 쿠데타와 정치 암투를 둘러싸고 투옥되거나 살해당한 남편을 대신해 아내가 등극했다. 이 범주에 속하는 경우, 중요한 것은 가족 신분이지 성별이 아니다.

가족의 내력과 무관하게 여성 지도자가 나오기 시작한 것은 여성운동이 한바탕 일었던 유럽이다.

그 첫 사례는 1979년 영국의 총리가 되어 11년간 수상직을 지낸 마거릿 대처다. 1987년 영국에서 안식년을 보내고 있을 때 그곳 친구들은 "영국에 남자는 한 명밖에 없는데 그 사람이 마거릿 대처"라는 농담을 하곤 했다. 대처의 일대기를 그린 영화 <철의 여인>에 보면 밀실과 패거리 정치로 아무 결정도 할 수 없는 정국에 한 이방인(여성)이 뛰어들어 복지 예산을 삭감하고 포클랜드 전쟁을 선포하는 등 혁신의 칼을 휘두른다. 그리고 이 여걸 뒤에는 늘 아주 훌륭한 내조자 남편이 따라다녔다. 그녀는 당시 미국 대통령이었던 레이건과 짝을 이뤄 시장 질주 사회를 만들어내는 데 성공했고, 이들의 신자유주의적 행보는 2008년 세계 금융위기를 초래하는 배경이 된다. 성취욕이 강한 외동딸이자 옥스퍼드 대학을 나온 대처는 사실상 당시 남성 정치계에 의해 선택되어 기성 정치계의 일을 총대 메고 해낸 경우라 할 수 있다. 그녀는 그런 면에서 전형적인 '명예남자'의 범주에 속한다.

1980년 대통령이 된 아이슬란드의 비그디스 핀보가도티르, 아일랜드의 로빈슨과 매컬리스, 핀란드의 할로넨 대통령은 대처와는 좀 다른 지도력으로 나라를 이끌었던 경우다. 대처가 전투적이고 돌진하는 유형이었다면, 북유럽의 여성 지도자들은 아줌마 같은 풍성함을 지니고 경제성장과 사람살이의 균형을 중시하고 사회적 협상과 합의를 도출하는 감각을 갖고 있었다. 대처처럼 추진력이 뛰어나다고 평가받는 독일 메르켈 총리의 경우, 애초 핵발전소를 보유해야 한다는 입장을 취하다가 반대 여론이 높아지자 국민 대토론회를 열고 윤리위원회를 구성하는 등 여러 방법을 통해 국민적 합의를 모아낸 모범을 보여주었다. 가족관계는 이들이 대통령이 되는 것과는 별 상관이 없고 이혼 경력 같은 것도 전혀 문제되지 않았다. 이들을 뽑은 나라는 예외 없이 성평등 지수가 아주 높았다.

박근혜 후보는 어디에 속하는 여성일까? 공주의 위엄을 지키면서 밀실 정치에 능한 가족 승계형 정치가일까? 권력의 생리를 통달한 '명예 남성'일까? 남녀는 대립적 존재가 아니라 다음 세대를 키워내는 동반자임을 아는 '여성'일까? 그녀는 최근 '군가산점 부활'을 암시하면서 다음 세대에 커다란 재앙이 될 '핵발전소'에 대해서는 침묵하고 있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의 일원이 된 '선진' 한국에서 나올 여성 대통령은 적어도 집단 우울증과 포퓰리즘으로 치닫는 파국에 틈을 낼 묘안은 갖고 있지 않을까? 그리고 '모성/돌봄의 시설화'와 '모성/돌봄의 사회화'를 구별해내는 감식력은 갖고 있어야 하지 않을까? 그래서 여성 대통령, 아직은 갈 길이 멀다.

조한혜정 연세대 문화인류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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