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그렉시트' 촉구한 스티글리츠의 주장을 주목한다

입력 2015. 7. 1. 21:24 수정 2015. 7. 2. 09: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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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리띠를 졸라맸어도 국민의 형편은 나아지지 않았다. 구제금융 프로그램에 따라 공무원 임금과 연금은 크게 깎였고, 일자리를 잃은 사람들이 길거리를 헤맸다. 민영화의 허울 아래 국영기업들은 외국 자본에 팔려나갔다. 씀씀이를 줄이면 살림살이가 나아질 것이라고 믿었던 국민의 고통은 더 심해졌다. 구제금융 직전인 2009년 2643억달러였던 그리스의 국내총생산(GDP)은 2014년 1944억달러로 쪼그라들었다. 같은 기간 나랏빚은 3010억유로에서 3171억유로로 늘었다. 국제통화기금(IMF)과 EU 집행위원회, 유럽중앙은행(ECB) 등 트로이카 채권단은 2010년 재정파탄 위기에 있던 그리스에 만병통치약인 양 ‘긴축’을 처방했다. 퍼주기 복지와 방만한 재정 운용 등이 가장 큰 문제라고 몰아붙였다. 지출을 줄이면 경제가 살아날 것이라고 했다. 그러나 5년이 지난 어제 그리스는 15억유로를 갚지 못해 국가 부도 상태에 처했다. 채권단은 그리스가 지금의 상황에 이르게 된 것이 무능한 정부 탓이라고 비난한다.

그러나 그리스 사태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채권단의 잘못이 크다는 점을 발견할 수 있다. 노벨 경제학상을 받은 두 석학 조지 스티글리츠 미국 컬럼비아대 교수와 폴 크루그먼 프린스턴대 교수는 현 사태의 원인 제공자로 채권단을 지목했다. 스티글리츠 교수는 “트로이카가 강요한 긴축은 최악의 결과를 가져왔다”고 밝혔다. 크루그먼 교수도 “그리스에 대해 듣는 대부분의 내용은 사실이 아니다. 긴축이 그리스 경제를 옭아맸다”고 진단했다. 물론 긴축이 성공한 사례는 많다. 1997년 외환위기를 겪었던 한국은 IMF의 긴축 처방을 충실히 이행해 조기에 관리체제에서 벗어났다. 제조업 기반의 한국 경제는 당시 고환율과 글로벌 경기회복에 편승해 수출이 늘자 위기를 헤쳐나갈 수 있었다. 반면 그리스는 관광 등 내수산업에 의존하는 국가다. 유로화를 쓰기 때문에 수입이 늘어도 환율변동에 따른 이익을 볼 수 없다. 게다가 2010년 이후 글로벌 경기는 침체를 면치 못하고 있다. 채권단이 강요한 긴축정책은 적용 대상도 시기도 모두 맞지 않았다. 몸에 맞지 않는 옷을 억지로 입히려 한 채권단의 해법은 명백하게 잘못된 것이었다.

채권단의 무능한 처방으로 지난 5년간 그리스가 절벽 끝으로 내몰리는 사이에도 유로존 부자 나라들은 떼일 걱정 없는 돈놀이를 했다. 그리스가 IMF 등에서 빌린 자금의 상당 부분은 독일과 프랑스 은행으로부터 진 빚을 갚는 데 써야 했다. 그리스 국내 경제를 위해 쓸 돈은 거의 없었다. 그리스 정부는 올해 초 빈곤층 가구에 대한 전기요금 면제와 식량 보조 법안을 통과시켰다. 수년째 지속해온 긴축으로 열악한 상황에 처한 서민을 지원하겠다는 취지였다. 그러자 트로이카는 “(긴축) 합의에 맞지 않는다”며 반대했다. 채권단이 구제금융을 연장할 테니 추가 긴축을 하라며 내놓은 협상안에 대해 알렉시스 치프라스 그리스 총리가 “굴욕”이라며 거부할 만하다. 트로이카의 행태는 선이자를 떼는 고리대금업자와 비슷하다. 채권단이 그리스를 강하게 몰아붙이는 것은 좌파 치프라스 정권을 몰아내고 보다 상대하기 쉬운 중도 정권을 수립하기 위해서라는 음모론마저 나온다.

오는 5일 국민투표를 앞둔 그리스 국민에게 스티글리츠 교수는 “(협상안에) 찬성하는 것은 거의 끝없는 침체를 의미할 것”이라고 했고, 크루그먼 교수는 “내가 그리스 국민이라면 반대표를 던질 것”이라고 했다. 채권단이 그리스 부채의 상당 부분을 탕감하거나 장기간 상환을 유예하지 않는다면 위기를 되풀이할 수밖에 없다고 봤다. 사실상 ‘그렉시트(그리스의 유로존 탈퇴)’를 선택하라는 극단적인 제안이다. 경제주권을 상실한 채 외부의 입김에 이리저리 끌려다닐 게 아니라 민주주의를 처음 실시한 국민답게 스스로 미래를 결정하라고 조언한 것이다. 2001년 유로존에 가입할 때 품었던, 부자가 될 것이라던 그리스 국민의 희망은 10년이 안돼 물거품이 됐다. 돌아온 것은 5년간 긴축으로 더 큰 고통을 감내한 것뿐이다. 그런데 이제 그것도 부족해 더 내놓으라고 한다. 그리스에 문제가 있지만, 그렇다고 구제금융의 횡포를 눈감아 주어서는 안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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