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arrative Report]78년 한자리.. 검은 땅 아픔 보듬는 '흰 느티나무'

2014. 7. 17. 03: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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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일보]

1990년

1990년 4월 최영철 당시 노동부 장관(왼쪽)이 강원 태백시 장성동 장성병원(현 태백병원)을 찾아 진폐환자를 위로하고 있다. 탄광산업이 쇠락하기 전에는 정부 관료와 정치인들이 진폐환자를 자주 찾았다. 근로복지공단 제공

13일 낮 12시경 강원 태백시 연화동 한보광업소 제1사갱 1280m 지점 막장에서 채탄작업을 하던 광원 서모 씨(44·선산부) 등 6명이 천장에서 갑자기 쏟아져 내린 10여 t의 죽탄에 출입구가 막히면서 갱내에 갇힌 채 구조를 기다리고 있다.(중략) 사고지점 갱도가 경사진 곳으로 물 섞인 죽탄이 계속 흘러내려 구조작업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1993년 8월 14일자 동아일보 사회면)

'따르릉 따르릉….'

탄광 사고가 난 91시간 뒤, 장성병원(현 태백병원)의 응급실 전화가 요란하게 울렸다. 차가운 침묵을 깨는 소리에 뜬눈으로 응급실에서 밤을 새웠던 박순영 수간호사(당시 44세·현 태백병원 간호부장)가 달려갔다. 전화기 너머로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생존자 출발합니다. 빨리 응급진료 준비하세요."

사고가 난 한보광업소와 장성병원은 차로 30분 거리. 사고 직후 병원은 비상대기 상태에 들어갔고 응급진료 준비는 이미 해놓은 터였다. 진료과장부터 말단 간호사까지 긴장한 눈빛으로 생존자를 기다렸다.

날카로운 앰뷸런스 소리가 점점 가까이 들려왔다. 앰뷸런스 문이 열리고 여기저기 탄가루를 뒤집어 쓴 구조대원과 현장대기 의료진이 서둘러 간이침대를 내렸다. 산소 호흡기를 한 채 가쁜 숨을 내쉬는 광부는 32세 '아다부키' 여모 씨. 아다부키는 간접채탄원(갱도 후미에서 보조하는 미숙련공)을 일컫는 일본식 용어다. 여 씨는 지하 2188m 아래 6.6m² 남짓한 공간에서 의식 없이 쓰러진 채로 발견됐다. 의료진이 보니 여 씨의 귀와 코 속은 석탄가루로 가득했다. 새빨갛게 충혈된 눈을 반쯤 뜨고 있지 않다면 큼지막한 석탄 덩어리와 구별할 수 없을 지경이었다.

박 수간호사는 여 씨의 작업복 오른팔 부분을 과감하게 찢었다. 몸에 내려앉은 탄가루를 닦을 겨를도 없었다. 오로지 손 끝 감각에 의존해 혈관을 찾았다. 미세하게 솟아 오른 혈관이 잡히자 수액 바늘을 꽂아 넣었다. 수액 공급이 시작되자 옆에 있던 보조 간호사들은 응급실 침대 옆에서 따뜻한 물로 여 씨의 몸을 연신 닦아냈다. 박 수간호사는 나지막이 읊조렸다.

"부디, 기적이 일어나게 해주세요."

응급실 안 모두가 같은 생각이었다. 여 씨는 살았다.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여 씨와 함께 매몰됐던 5명은 차갑고 새까만 시신으로 발견됐다. 한 사람의 목숨을 건져냈다는 뿌듯함은 이내 참담함으로 변했다. 희망을 버리지 않았던 나머지 광원의 가족들은 병원 복도에 주저앉아 통곡했다.

"이곳만은, 이곳만은 오기 싫다고 그리 당부했는데…."

○ 입에 올리기도 무서운 병원

예나 지금이나 장성병원, 혹은 현 태백병원은 태백에서 유일한 종합병원이다. 하지만 이 지역에서 '장성병원에 간다'는 말은 '공포'의 다른 말이었다. 광원과 가족이 대부분이던 지역 주민들이 장성병원에 갈 일은 가족이나 본인이 탄광 사고를 당했거나, 폐에 탄가루가 쌓여 숨쉬기가 힘들거나 둘 중 하나였다.

1970, 80년대 태백 장성지역의 대형 광업소들은 마을을 향해 대형 스피커를 설치하고 매일 출근, 점심, 퇴근 시간에 라디오 방송을 내보냈다. 당시 인기 프로그램이었던 KBS라디오의 '김삿갓 북한방랑기'부터 새마을운동 노래까지 하루의 일과는 라디오 방송과 함께였다.

이러던 방송이 갑자기 중단될 때, 마을 사람들은 움직임을 멈췄다. 마을 전체를 뒤덮는 무덤 같은 고요…. 그랬다, 탄광에서 방송 중단은 사고가 터졌다는 의미였다. 이런 날이면 마을 안 누구도 큰 소리를 내지 않았다. '까만 노다지' 덕에 사람들로 넘쳐나던 선술집은 문을 닫았다. 어리광 부리던 어린 아이들도 그늘진 어머니의 얼굴을 보며 칭얼거림을 멈췄다.

아낙네들은 마을 어귀에서 발을 동동 굴렀다. 통근버스에서 내리는 광원들의 얼굴을 일일이 확인했다. 마지막 통근버스에서도 남편이 보이지 않으면 이들은 아들딸을 남편의 단골술집으로 보냈다. 그래도 남편을 찾지 못하면 죽어도 가기 싫은 '그곳'으로 발걸음을 향했다. 그러면서 속으로는 끊임없이 되뇌었다. '제발 그곳에서 마주치지 말아요….'

광업소들은 사고가 나도 가족들에게 먼저 알리지 않았다. 가족이 몰려오면 구조작업에 방해가 될 수도, 병원으로 옮기는 데 지장을 받을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사고가 난 날 남편이 집으로 돌아오지 않으면 아내들은 두려운 마음을 안고 그저 장성병원을 찾았다.

○ 한국 최초의 산재병원

2014년

1982년부터 태백병원에서 근무한 박순영 태백병원 간호부장이 15일 병원에서 진폐환자를 돌보고 있다. 박 부장은 "이 병원은 한국 탄광 역사의 산증인"이라고 말했다. 태백=김준일기자 jikim@donga.com

태백병원은 한국에 세워진 첫 산재병원이다. 처음부터 이 병원은 탄광 근로자를 위해 세워졌다. 탄생은 일제강점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일제는 1931년 만주사변 등 본격적인 중국 대륙 침략을 위해 조선광물 이용에 열을 올렸다. 이른바 '조선의 병참기지화' 정책이었다. 북한의 유연탄 탄광지대를 활용했던 조선총독부는 1933년 일본의 전력재벌이 세운 '삼척개발주식회사'를 통해 비교적 남쪽지방인 삼척(1981년 시로 승격하기 전까지 태백은 삼척에 속했다), 영월지방의 무연탄 개발에도 본격적으로 나섰다. 유연탄과 달리 무연탄은 연소할 때 연기가 나지 않았다. 일본 군수공장들이 원하는 연료였다. 공장에서 연기가 나지 않으면 폭격을 당할 가능성도 줄기 때문이었다. 당시 삼척개발주식회사는 태백산 일대의 석탄광구와 철도를 운영한 거대기업이었다.

이때 태백병원이 탄생했다. 탄광이 본격적으로 개발되고 광산사고가 끊이지 않자 이 회사가 '삼척개발 삼척탄좌병원'을 연 것. 이 병원은 광복 뒤인 1950년 대한석탄공사가 인수했고 장성광업소 부속병원, 대한석탄공사 직할 장성병원 등으로 명칭이 바뀌었다. 1977년 한국근로복지공사가 병원을 인수한 뒤에도 1997년까지 장성병원이라는 이름이 유지됐다. 이후 태백중앙병원, 태백산재병원으로 이름이 바뀌었다가 이달 1일 근로복지공단 태백병원이라는 새로운 이름을 갖게 됐다.

78년간 6번에 걸쳐 이름이 바뀌는 동안에도 병원은 한자리를 지켰다. 작은 개천 하나를 사이에 두고 장성광업소를 바라보며…. 한때 최대 45개에 달하던 태백의 탄광 중 장성광업소는 현재 남은 두 개의 탄광 가운데 하나다.

'탄광촌 풍속이야기'를 쓴 정연수 탄전문화연구소장은 태백병원에 대해 "광원들의 탄생과 죽음을 모두 간직한 공간"이라고 말했다. 원기준 광산지역사회연구소장은 "광산 근로자와 가족들의 한이 서려 있는 곳"이라고도 했다.

○ 진폐 환자는 떠나지도 못하고…

.

강원 태백시 장성동에 자리한 태백병원 전경.

'태백중앙병원의/ 환자들은/ 더 아프게 죽는다// 아버지는 죽어서/ 밤이 되었을 것이다// 자정은/ 選炭(선탄)을 마친 둘째형이/ 돌아오는 시간이다// 미닫이문을 열고/ 드러내 보이던// 형의 누런 이빨 같은// 별들이 켜지는 시간이다.'(박준 시인 '태백중앙병원')

노태우 정부 때인 1989년 석탄산업합리화 정책에 의해 이곳의 탄광은 대부분 문을 닫았다. 자연스레 광원과 가족들은 새로운 직장을 찾아 전국으로 뿔뿔이 흩어졌다. '개도 1000원짜리는 안 물어 간다'는 말이 유행할 정도로 번창했던 이곳에 광원이 사라지자 전국에서 모였던 서비스업 종사자들도 함께 떠났다. 한때 10만 명을 넘던 인구는 지금은 5만 명에도 못 미친다.

떠나고 싶어도 떠나지 못한 사람들도 있었다. 진폐환자들은, 멀쩡한 줄 알았던 몸으로 타지로 떠났다가도 돌아왔다. 모두가 그들을 잊어도 태백병원만은 여전히 그들을 보듬었다.

지금은 작업할 때 방진마스크를 써서 탄가루가 몸속으로 들어가는 걸 막는다. 예전에는 아니었다. 광목수건을 둘둘 말아 입에 무는 게 다였다. 그러다 보니 막장에서 광원들은 탄가루를 마셨다. 탄가루는 폐 세포에 달라붙어 서서히 폐를 굳힌다. 호흡은 거칠어지고 식은땀이 난다. 결핵이 생기고 뇌중풍이 온다. 더러 파킨슨병이 생기기도 한다. 이 때문에 진폐환자들은 "우리는 가슴을 파는 '남창'"이라고 자조하기도 했다.

이 병원에 입원해 있는 진폐환자 최정중 씨(72)는 지금은 없어진 태백 화전동 어룡광업소에서 1965년부터 광원으로 일했다. 13년간 광원생활을 하던 끝에 그는 막장을 탈출했다. '이러다 죽을 수도 있겠구나'라는 생각이 고개를 들 즈음이었다. 산속에서 버섯농사를 짓던 그는 나이가 들고 근력이 약해지자 진폐증 판정을 받았다. 그렇게 태백병원에 돌아온 게 벌써 15년째다. 최 씨는 "뿔뿔이 흩어져 소식도 모르던 예전 동료를 이곳에서 만났다"며 쓴웃음을 지었다.

의사들은 더이상 태백병원에서 근무하고 싶어 하지 않는다. 빈자리는 군 복무를 대신하는 공중보건의사들이 채우고 있다. 젊은 간호사도 드물다. 벽지산골 폐광촌 작은 병원을 원하는 젊은이를 찾기가 쉬울 리 없다. 태백시의회가 지원하는 응급실 예산도 2003년 이후 연 2억 원에서 늘어나지 않았다. 태백이 쇠락해 간 것처럼 병원도 쇠락하고 있는 게 분명하다.

그래도, 304명의 진폐환자가 입원해 있는 이곳은 한국 탄광산업의 흥망성쇠를 간직한 채 굳건히 자리를 지킬 것이다.

태백=김준일 기자 jikim@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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