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일기] ‘착한 사마리아인’은 그 자리에 없었다

중앙일보

정경민뉴욕 특파원 지난 3일(현지시간) 58세 한인동포 한기석씨가 숨진 뉴욕 지하철 49번가역 사고현장을 찾아갔다. 사고 흔적은 이미 남아 있지 않았다. 달려오던 전동차는 역 안에 들어서자 거북이걸음을 했다. 평소 같으면 잰걸음으로 전동차 쪽으로 다가섰을 사람들도 전동차가 멈출 때까지 벽에 붙어 서 있었다. 이틀 전 그곳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다 알고 있다는 듯.

 선로 아래를 내려다봤다. 족히 어른 목 높이는 돼 보였다. 목격자의 증언이 하나 둘 보태지면서 그 아래에서 벌어진 불편한 진실이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한씨는 횡설수설하며 승객들에게 집적거리는 흑인 청년을 제지하려다 선로 아래로 떠밀려 추락했다. 주변엔 사람들이 있었다. 그러나 혹시 자신도 흑인 청년에게 떠밀릴까 두려워 벽에 붙어서기 바빴다. 심지어 황급히 자리를 피해 버리기도 했다.

 잠시 선로에 주저앉았던 한씨는 전동차가 다가오자 본능적으로 플랫폼에 매달렸다. 마침 현장에 있던 뉴욕포스트 프리랜서 사진기자 우마르 압바시는 그 장면을 카메라 담기 바빴다. 압바시는 NBC 방송과의 인터뷰에서 "한씨가 떨어지고 전동차에 치이기까지 22초가량 시간이 있었다"고 말했다. 단 한 명만 그에게 손을 내밀었다면 구할 수도 있지 않았을까.

 충격적인 건 그 다음이었다. 전동차에 치인 한씨가 플랫폼으로 끌어올려지자 그제야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스마트폰을 꺼내 사진과 동영상을 찍기도 했다. 주변사람을 대신해 흑인 청년 앞으로 나서는 용기를 낸 한씨. 그러나 절체절명의 순간 사람들은 그가 내민 손을 외면했다.

 숱한 테러와 범죄 속에도 미국 사회를 지탱해온 덕목은 신약성서에 나오는 '착한 사마리아인 정신'이었다. 사막 한복판에서 강도를 당해 쓰러진 유대인을 사회지도층 제사장과 레위인들은 외면했다. 그런데 유대인과 앙숙이었던 사마리아인이 위험을 무릅쓰고 구해줬다. 인종·종교·이데올로기를 떠나 위급한 상황에 처한 이웃은 외면하지 않는다는 정신이었다. 2001년 9·11 테러 당시만 해도 뉴욕엔 착한 사마리아인이 넘쳤다.

 그러나 테러와의 전쟁 11년과 글로벌 금융위기 4년을 겪으며 착한 사마리아인도 위축될 수밖에 없었던 것일까. 제 앞가림하기에도 벅차게 된 소시민들에게 이웃의 위태로움을 돌아보는 여유 따윈 사치가 됐을지 모른다. 다행스러운 건 똑바로 보기조차 거북한 이 장면들이 연일 미국 방송에 보도되면서 자성론이 퍼지고 있는 거다. 메마를 대로 메말라 버린 미국인들의 가슴에 착한 사마리아인의 따뜻한 마음을 한 뼘이라도 되살릴 수 있다면 한씨의 죽음도 헛되지는 않을 터다.

정경민 기자jkmoo@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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