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 햇발] 지갑은 강둑에 흘리고, 가로등 밑만 맴돈다 / 정남구

2016. 2. 4. 19: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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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일본이 ‘잃어버린 20년을 보냈다’는 말에 토를 달 사람은 드물 것이다. 그런데 노벨경제학상을 받은 폴 크루그먼의 설명을 들으면 졸음이 싹 달아날 수도 있다. 그는 지난해 10월20일치 <뉴욕 타임스>에 기고한 ‘일본을 다시 생각한다’는 제목의 칼럼에 이렇게 썼다.

“일본의 생산가능인구 1인당 생산 증가율을 보면, 2000년 무렵부터는 미국보다 높다. 지난 25년을 돌아봐도 미국과 거의 차이가 없다.”

일본의 성장률 수준 저하는 1999년 시작된 생산가능인구 감소 탓이 크고, 그간의 저성장은 실력에 걸맞다는 얘기다. 물론 나는 ‘잃어버린 20년’이란 표현을 그대로 쓴다. 많은 이들의 삶이 어려워졌고, 대규모 적자를 감수한 재정지출로 성장률을 떠받친 것이어서 경제 시스템에 내상도 심하기 때문이다. 일본의 연간 재정적자는 국내총생산의 6%가 넘는다. 현재 국가채무비율은 240%가량인데, 이대로 가면 2030년에는 300%가 된다. 재정 위기는 시간문제다.

일본 정부가 그 많은 빚을 내 써야 하는 이유는 수요가 생산분을 감당하지 못해서다. 수출 수요는 외부 환경의 영향이 큰 것이고, 문제는 민간소비 부진이다. 민간소비가 살아나지 못하는 이유는 가계 소득이 늘지 않는데다, 앞날에 대한 불안감에 지갑 열기를 꺼리기 때문이다. 그 결과 19세기 후반 영국 대불황기와 비슷한 물가하락 기조가 이어지고 있다.

이런 흐름은 고이즈미 준이치로 총리(2001~2006 재임) 정부가 이른바 ‘구조개혁’을 전면에 내건 시기부터 본격화했다. ‘종신고용, 연공임금’ 제도가 파괴되고, 임금수준이 낮고 앞으로도 늘어날 가능성이 낮은 비정규직이 급증했다. 젊은이들은 ‘고용기회를 잃어버린’ 세대가 됐다. 연금제도에 대한 불신이 커진 것도 소비심리를 위축시켰다.

‘수출’로 돌파하자는 유혹에 빠진 적도 있다. 고이즈미 정부는 ‘구조개혁’으로 경기가 살아나지 못하자, 50조엔을 외환시장에 투입해 엔화가치를 떨어뜨렸다. 엔화가치를 끌어내리는 것은 소비자에게 돈을 걷어 수출기업에 보조금을 주는 것과 마찬가지다. 수출은 한동안 성장률을 끌어올렸지만, 엔화가 다시 강세를 보이자 도루묵이 됐다. 민간소비 부진은 더 깊어졌다. 지금 아베 신조 총리 정부의 아베노믹스는 ‘엔화 약세 유도’라는 마약에 다시 손을 댄 것이나 마찬가지다. 엔화 약세로 수출 대기업이 큰돈을 벌지만, 지난해 2, 3분기 성장률은 마이너스다. ‘분수효과’가 일어나지 않고 실질임금은 줄어드니, 소비 부진은 여전하다.

‘민간소비의 안정적인 증가’는 제쳐두고 ‘수출로 먹고사는 나라’라고 되뇌는, 한쪽 눈을 감은 논리는 한국에서도 경제와 사회를 일본이 걸어간 늪으로 빠져들게 하고 있다. 노동자의 임금을 비용으로, 그것을 줄이는 것을 경쟁력 강화로 보는 ‘구조개혁’ 논리는 이제 탐욕의 발톱을 노골적으로 드러내고 폭력으로 치닫고 있다. 돌아보라. 우리나라에선 민생 파탄이 일본보다 이미 심각하다. 소비 부진에 따른 저성장이 뿌리를 내려가고, 최근에는 이를 메우느라 나랏빚이 빠른 속도로 늘고 있다.

정남구 논설위원

흐름을 바꾸는 데 기발한 경제 이론이 필요한 게 아니다. 사람과 노동을 중히 여기고, 함께 잘 살자는 마음에서 의미있는 궁리가 시작된다. 환한 가로등 아래를 맴돌며, 어두운 강둑에서 흘린 지갑을 찾겠다는 건 사기다. 정상적인 정부라면 수출 대기업 걱정은 놔두고, ‘고단하고, 억울하고, 앞날에 대한 불안에 마음 졸이는’ 사람들에게 불을 가져가야 한다.

우리나라에서도 내년부터 생산가능인구가 줄어들기 시작한다.

정남구 논설위원 jej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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