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수대] 참을 수 없는 호칭의 무거움

전수진 2015. 8. 29. 04: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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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수진</br>정치국제부문 기자

보지 않기로 했는데 보고야 말았다. 댓글 얘기다. 지난 22일자였던 ‘김정은 북한 국방위원회 제1위원장에게’ 온라인판에 달린 댓글엔 반말·비속어가 여럿 눈에 띄었다. 얼굴 사진이 기자를 상대적으로 어려 보이게 위장해준 덕에, 편한 마음으로 비판 의견을 제시해주신 것으로 알고 감사히 받아들인다. 하지만 앞으로도 ‘위원장’ 호칭은 계속 쓸 작정이다. 댓글까지 부러 달아주신 분들껜 죄송하지만, 김 위원장을 비속어로 칭할 일은 없다고 단언한다. 그리 한다면 남측 대통령을 입에 담지 못할 단어로 칭하는 북한과 다를 바가 무엇인가. 하향 평준화는 정중히 사절한다.

 김 위원장을 김 위원장이라고 부르면 안 된다는 분들의 논리는 ‘김정은에겐 호칭을 붙여주는 존대를 하면 안 된다’로 요약된다. 한국인이 유난히 호칭에 민감한 건 사실이다. 동방예의지국의 기자가 맞냐고 또 댓글을 쓰시기 전에 한 번만 되돌아보자. 우리가 때로 호칭의 강박에 사로잡혀 일상에서 과하거나 이상한 호칭을 쓰는 경우가 많다는 걸. 아무 혈연관계가 없는 식당 서빙 스태프가 ‘언니’가 되고, 대부분의 남성은 피 한 방울 안 섞인 연하 여성들에게 ‘오빠’라고 불리면 입꼬리가 올라가질 않나. 여성들도 ‘누난 내 여자라니까’라는 식의 노래에 열광하긴 마찬가지.

 영어신문 근무 시절, 미국인 에디터들은 “한국 미용실엔 티처(teacher), 집에는 앤트(aunt)가 있다”고 농담하곤 했다. 미용사를 ‘선생님’으로, 아이 돌보미를 ‘이모’라고 부르는 걸 꼬집은 거다. 어떤 이는 “한국 남자들은 왜 다 ‘오빠’이고 싶나”란 기획을 지시했을 정도니, 한국 호칭 문화가 꽤나 신기했던 모양이다. 하지만 내겐 할아버지뻘인 그들이 내게 자신을 이름만으로 부르라는 게 신기했다. ‘토비 스미스 부국장’을 “헤이, 토비”라고 부르는 데는 시간이 걸렸다. 연령·직급 고하를 막론하고 이름만으로 부르는(first-name basis) 게 친분의 척도라는 건 한국 땅에서만 살아온 내겐 낯설었다.

 서양식이 다 좋은 건 아니지만, 우리 식 호칭도 다이어트를 하면 어떨까. 친분이 두텁지 않을 때나, 업무상 만나는 경우라면 ‘~씨’ 혹은 ‘~님’으로 통일하는 방식 말이다. 은행이나 관공서에서 “선생님은 이 적금이 맞으세요”라거나 “사모님, 여기에 사인하세요”라는, 손발이 오그라드는 호칭은 더 안 들었으면 하는 마음에 해보는 말이다. 독자, 아니 독자분, 혹은 독자님들의 생각은 어떠실지 궁금하다.

전수진 정치국제부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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