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폐 한 장, 너 때문에 천국과 지옥을 오갔어

2012. 12. 10. 16: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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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문종성 기자]

어쩔 수 없이 덤벙대는 성격이다. 시장 푸줏간에서 고기값을 지불하려 상·하의 주머니를 정신없이 뒤적거리던 문군이 패닉에 빠졌다. 감쪽같이 사라진 50유로짜리 지폐 한 장. 분명 상의 주머니에 넣은 기억이 있다. 허나 돈이 문제가 아니다. 평소에도 흘리고 다니는 게 취미인 그에게 이번 사건은 꽤 심각한 사안이다. 정리정돈과 메모에 대한 중요성을 알면서도 매번 무시했던 대가다.

목적지인 아스토르가(Astorga)에 도착한 순례자들은 함께 푸짐한 만찬을 하기로 했다. 하루 종일 도보 여행으로 지친 순례자들은 저녁 메뉴로 돼지고기와 야채, 약식 볶음밥 그리고 이 모든 것의 음미를 더해줄 포도주와 콜라를 몹시도 갈망한다. 문군 역시 격하게 동의하며 지글지글 익는 돼지고기의 식감을 마음껏 느낄 준비를 한다. 그런데 어처구니없는 분실이라니.

그는 바삐 숙소와 푸줏간을 오가며 단서를 찾는다. 순례자들도, 푸줏간 주인도 돈의 행방에 대해 전혀 아는 기미가 없다. 애타는 심정으로 땅거미가 진 거리의 바닥들도 훑는다. 그러나 수많은 사람들이 지나가는 길에 흘린 지폐가 남아있을 리 만무하다. 돼지고기의 꿈은 이렇게 무너지는 것인가? 자책하는 순간에도 하루의 노고를 달래줄 돼지고기만을 오매불망 기다리는 순례 동지들 생각에 발만 동동 구른다.

그림 같은 산맥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지는 곳

오르비고 다리(Puente de Orbigo). 452년 스와비아인들이 서고트 족에 의해 학살당했고, 그리스도교 군대와 무어인들이 전투를 벌였던 곳이기도 하다. 로마 시대 이후에는 가축을 운송하는 통로였다고 한다.

ⓒ 문종성

오스피탈 데 오르비고(Hospital de Orbigo)에서 가장 눈에 띄는 산 후안 바우티스타 성당(Iglesia de San Juan Bautista).

ⓒ 문종성

계속된 언덕을 올라 만난 산토 토리비오 십자가(Cruceiro Santo Toribio). 토리비오 주교가 마을에서 추방당했을 때 이곳에서 작별 인사를 하며 무릎을 꿇었다고 전해진다.

ⓒ 문종성

13세기, 로마 시대 다리 위에 증축된 오르비고 다리(Puente de Orbigo)는 세르반테스에게 돈키호테에 대한 영감을 준 다리로 유명하다. 뿐만 아니라 숱한 전투와 거기에서 파생된 전설을 가지고 있는 카미노의 대표적인 다리기도 하다. 이 다리를 건너면 성 요한 기사단의 영지라고 불리는 오스피탈 데 오르비고(Hospital de Orbigo) 마을이 나온다. 그들이 운영한 산 후안 바우티스타 성당(Iglesia de San Juan Bautista)은 단출한 이 마을에서 가장 눈에 띄는 건축물이다. 대부분의 순례자들은 이곳에서 하루를 묵으며 이곳 역사에 대한 이해를 돕는 한편 영혼의 안식을 취한다.

정오를 지난지 오래지 않은 터라 문군은 계속 전진한다. 하릴없이 걷던 길에 오르막이 계속되니 난처해지다가 어깨 통증이 심해진다. 뒤따라온 존이 하마 같은 자전거를 밀어준다. 한 시간쯤 더 언덕을 걸으니 둘은 결국 탈진 상태에 이른다. 바로 이곳에 산토 토리비오 십자가(Cruceiro Santo Toribio)가 있다. 정상에 오르니 기쁘기 그지없다. '기쁨의 산'이라는 이름 그대로를 절감하는 순간. 정상에서는 로마의 신 마르스에게 봉헌됐다는 텔레노 산(El teleno)을 포함해 그림 같은 산맥들을 파노라마처럼 볼 수 있다. 이제 비탈길을 내려가는 일만 남았다.

"할렐루야!" 탄성이 절로 터졌다

아스토르가의 입구. 커다란 조개 조형물이 인상적이다.

ⓒ 문종성

가우디 건축물로 알려진 카미노 박물관. 로마 시대 길들의 역사적인 기록과 유물이 있다.

ⓒ 문종성

드디어 아스트로가에 당도, 큰 조개가 순례자를 반긴다. 중간에 지나치는 알베르게에 노크를 해보지만 모두 닫혀있다. 아스트로가에는 사설 알베르게가 많지만 순례자를 위한 숙소라기보다 그저 호스텔의 다른 이름인 것만 같다. 마침내 해거름 무렵 공립 알베르게를 찾았을 때는 모든 순례자가 도착해 있는 상황. 다들 같은 루트를 걸었으니 허기가 지고, 허기가 지니 식탐이 요동치는 것은 인간의 피할 수 없는 욕망일 터. 돼지고기는 모두의 소망이자 순례자들을 한마음으로 단결시켜주는 힘을 가지고 있었다.

울상이 된 문군은 어쩔 수 없이 제 돈으로 고기를 구입한다. 육질이 살아있고, 두툼한 살코기가 치명적 유혹을 해오는 상황이지만 숙소로 돌아오는 문군의 발걸음이 산을 오를 때보다 더 무겁다. 사실 처음 뒤적거렸을 때 상의 주머니 지퍼가 열려 있었다. 그러나 깊숙한 주머니에서 지폐가 쉬이 빠지긴 쉽지 않은 일이다. 아마 운수 나쁘게도 손을 넣고 빼다 자신도 모르게 흘러나왔을 공산이 크다. 칠칠맞지 못한 그에겐 수원수구(誰怨誰咎) 이 한 마디만 뇌리에 박힐 뿐이다.

숙소에 다다른 문군은 검은 윈드 재킷을 벗는다. 날이 추워 걸친 겉옷이 실내에서는, 특히 부엌에서는 활동하는 데 여간 불편하지 않다. 그때 불현듯 섬광처럼 스치는 깨달음! 그는 검은 윈드 재킷 속으로 또 다른 얇고 검은 스포츠 자켓을 입고 있었다. 푸줏간으로 나서기 전 추울까 그 위로 윈드 재킷을 덧입은 것이다. 그걸 잊고 있었다. 미묘한 확신 속에 왼쪽 주머니에 손을 넣는 순간, 만세, 사방에서 '할렐루야!' 성가곡이 터져 나온다. 그렇게 찾아 헤매던 50유로짜리 지폐가 얌전하게 접혀 있다!

구제불능 덜렁쇠 같으니! 이런 성격으로 카미노를 걷는 스스로가 민망하고 한심스러울 뿐이다. 어쨌든 문군은 생기를 되찾았고 가눌 수 없는 감동 앞에 돼지고기는 다시 마성의 유혹을 해온다. 식욕 역시 되살아난다. 재희와 존, 진을 포함해 알베르게에서 처음 만난 순례자 산티(Santi)와 헬리오스(Helios)가 저녁 식탁에 함께 한다.

"난 사진기를 들고 다니지 않아. 내 머리와 눈이 마음의 사진기니까."

이 사랑스러운 육즙, 이게 다 지폐 한 장 때문

아스토르가 공립 알베르게에서 처음 만난 순례자 산티(좌)와 헬리오스. 재밌게도 문군까지 모두 동갑이다.

ⓒ 문종성

두툼하고 육질이 살아있는 돼지고기. 큼지막하게 썰어 상추에 싸서 양념을 더해 한 입 먹으면 그 맛이 기똥차다.

ⓒ 문종성

산티는 산티아고의 준말. 게다가 그는 여태 만난 순례자 중 가장 자유로운 성격에 가장 잘 생긴 외모를 자랑한다. 카미노는 두 번째란다. 이번 순례의 목표는 철저하게 음미하며 걷기. 남들은 그냥 지나치는 길에도 그는 자연과 사물을 새롭게 해석해 오래도록 머물다 온다. 때문에 남들보다 두어 시간 늦게 숙소에 도착하지만 누구보다 풍성한 이야기 보따리를 풀어 놓는다.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이름 알지? 만나서 반가워."

호탕하게 악수를 건네는 남자 역시 인상이 좋아 보인다. 매일 아침 머리 넷 달린 마차로 동쪽 궁전에서 서쪽 궁전으로 달려갔다가, 황금의 배로 다시 동쪽으로 돌아간다고 전해지는 그리스 신화의 태양신의 이름, 헬리오스란다. 그는 첫 만남인 저녁 식사에 소고기와 초콜릿을 건넨다. 베풀기 좋아하는 카미노의 생리를 잘 아는 문군도 그에게만큼은 다른 직감을 갖는다.

'이 친구는 카미노라서 베푸는 게 아니야. 원래 친절한 성격이군.'

느낌이 좋은 두 길동무가 생겼다. 이날 밤, 패닉에 빠진 덤벙 대마왕 문군에게 반전이 없었더라면 그는 육즙이 터져 나오는 돼지고기 맛을 제대로 음미할 수도, 방명록에 차분하게 소감을 적을 수도, 새로운 순례자들과 환환 표정으로 인사 나눌 수도 없었을지 모른다.

잃어버린 물건을 극적으로 다시 찾을 때, 오랜만에 꺼내 든 옷 주머니에서 무심코 지폐를 발견했을 때의 기분은 언제나 최고다. 돼지고기 향에 취해 지나치게 기분이 상기된 탓일까. 그는 다음날 카미노 순례 방법에 대해 무모한 아이디어를 품고 잠자리에 든다. 덤벙대는 그에게도 청춘의 뜨거운 피는 흐르나 보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에는 2012년 1월 30일의 기록이 담겨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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