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 한국사회] 사랑과 폭력 / 김희경

2015. 6. 29. 1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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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상대가 나를 사랑하거나 깊이 의지한다는 사실을 내가 알고 있는 상태에서 힘을 휘두른다면, 이는 신체적 상해에 더해 상대의 마음을 악랄하게 모욕하는, 질이 나쁜 폭력이다. 다수의 가정폭력이 그렇고 최근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서 폭로된 데이트 폭력도 그 한 예다.

피해자의 증언에 따르면 가해자는 폭행의 이유로 '네가 구타유발자'라며 피해자 탓을 했다. '맞는 것보다 그를 잃는 게 더 두려웠다'던 피해자는 맞을 짓을 계속하는 자신을 탓하며 더 좋은 연인이 되겠다는 다짐을 했다고 한다.

나는 이와 매우 비슷한 이야기를 다른 폭력의 맥락에서도 들은 적이 있다. 재작년 겨울 세상을 놀라게 했던 아동학대사망 사건 이후 민간단체와 국회의원이 함께 만든 진상조사위원회에서 사무국장을 맡아 학대로 숨진 아이가 살던 지역에서 조사를 할 때의 일이다.

당시 동네 이웃과 교사, 아동보호전문기관 상담원의 증언으로 본 가해자와 숨진 아이의 관계는 위의 데이트 폭력 가해자-피해자의 관계와 비슷했다. 가해자는 은폐해온 폭행이 드러난 뒤에도, 아이가 거짓말을 하는 등 맞을 짓을 해서 때렸다고 아이 탓을 했다. 반면 아이는 죽도록 맞으면서도 계속 가해자의 마음에 들려고 노력했고 '요리도 잘하는 예쁜 엄마'라고 시를 쓰고 그림을 그렸다. 데이트 폭력의 피해자는 연인을 잃는 게 두려워 가해자의 말들을 내면화했다면, 학대로 희생된 아이는 살아남기 위해 가해자의 논리를 내면화했다.

성인과 아이가 처한 상황은 물론 다르지만, 피해자가 가해자에 대한 애착을 잘 버리지 못하는 것도 사랑의 허울 아래 행해지는 폭력에서 공통적으로 드러나는 서글픈 모습이다. 가해자들이 폭행하다가 잘 대해주기를 반복하기 때문이다.

사랑의 탈을 쓰고 저질러지는 이 고약한 폭력이 데이트 폭력과 아동학대의 비정상적 상황에서만 발생하는 일일까? 그렇지 않다. 나는 사랑을 폭력과 연관 짓는 사고방식이 이미 우리 사회에 만연해 있고 그 단적인 예가 한국인 85% 이상이 찬성한다는 이른바 '사랑의 매', 즉 체벌이라고 생각한다.

체벌이 훈육 방법으로도 효과적이지 않다는 연구도 숱하게 많지만, 그보다 더 내가 체벌이 문제라고 생각하는 가장 큰 이유는 폭력도 사랑이라고 가르치기 때문이다. 사랑하고 돌보는 관계에서도 더 힘이 세거나 권력을 가진 사람은 문제 해결 방법으로 폭력을 사용할 수 있다는 메시지를 전달하기 때문이다.

체벌은 모든 아동학대의 시작이며, 폭력을 '할 만한 것'으로 여기게 만드는 첫 단추다. 진화심리학자 스티븐 핑커는 폭력성의 역사를 살핀 책 <우리 본성의 선한 천사>에서 미국의 예를 들어 체벌 찬성률은 살인율과 궤적이 같다고 설명했다. 체벌을 용인하는 하위문화가 성인의 극단적 폭력도 부추긴다는 뜻이다. 유엔아동권리위원회가 체벌 근절이 '사회에서 모든 형태의 폭력을 줄이고 방지하기 위한 핵심전략'이라고 강조하는 것도 그런 맥락에서다. 체벌은 6월 현재 46개 국가가 법으로 전면금지한 폭력이다.

국내에서도 9월부터 '아동의 보호자는 아동에게 신체적 고통이나 폭언 등의 정신적 고통을 가해서는 안 된다'고 체벌 금지를 규정한 아동복지법 개정안이 시행된다. '체벌'이라는 단어를 분명하게 쓰지 않았고 다른 법들은 체벌을 애매하게 허용하는 탓에 전면금지라고 할 수는 없지만, 이전에 비하면 한걸음 나아갔다.

데이트 폭력, 아동학대, 체벌 등 친밀한 관계에서 사랑의 이름으로 행해지는 폭력의 특징은 당하는 사람에게 '내가 맞을 짓을 했다'고 믿도록 강요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세상에 '맞을 짓'이 어디 있겠나. '사랑의 매'도 없다. 사랑은 매나 폭력이 아니라 사랑이어야 한다.

김희경 세이브더칠드런 권리옹호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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