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 한국사회] 널 때리는 이유 / 이라영

2015. 6. 24. 19:00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한겨레]

사건은 각각 다르지만 '사과들'이 쏟아진다. 올바른 사과란 상당히 어렵고 사과에는 많은 문제들(권력관계, 사회의 상식, 발화자의 도덕성 등)이 함축되어 있음을 요즘 새삼스럽게 깨닫는다. 어떤 사과는 섬뜩하고, 어떤 사과는 너무 한심해서 도와주고 싶은 지경이며, 어떤 사과는 뜬금없다. 이상한 사과들을 보다 보니 죄지은 사람은 따로 있는데 나 자신도 자기검열에 시달린다. 나는 제정신을 차리며 살고 있을까. 미쳐 보이는 사람이 한둘이 아니라면 혹시 내가 미쳤나, 심란하기 짝이 없다. 사람을 알고 싶지 않은 병에 걸릴 것 같다.

한꺼번에 연달아 여성폭행에 대한 고발을 접했다. 폭력 사건이 정치적 진영을 걱정하거나 공격하는 도구가 되는 상황은 더욱 비참하다. 도덕적 검열에 '더' 시달리는 진보라서 가해자가 더 비판받는다는 안타까운 시선, 급진 페미니스트의 극성스러움이 '대의'를 해친다는 고약한 순진무구함, 각양각색이다.

'사랑'이라며 무죄가 선고되었던 한 성폭력 사건의 10대 여성 피해자는 법정에서 "여자라서 이런 피해를 당했다. 여자가 싫다. 남자로 살고 싶다"고 말했다. 반면 이슬람국가(IS)로 간 10대 남성은 "페미니스트가 싫다. 그래서 아이에스(IS)가 좋다"는 말을 남겼다. 두 10대의 말은 우리 사회가 찬찬히 들여다봐야 하는 거울이지만 엉뚱하게도 '아이에스보다 무서운 페미니스트'(김태훈 칼럼)만 남았다. '아이에스보다 무서운 페미니스트'는 망상이지만, 남성에게 구타와 성폭행을 당하는 여성은 실재다. 실재하는 폭력을 고발할 용기보다 망상에 기초한 떳떳한 혐오와 폭력이 더 기세를 부린다.

스웨덴 작가 오사 그렌발의 그래픽 노블 <7층>은 작가의 실제 경험에 기반한 데이트 폭력의 기승전결을 명료하게 보여주는 작품이다. 낭만적인 연애, 조금씩 드러나는 그의 이상한 태도, 그 태도들을 '날 사랑하기 때문'이라고 스스로 세뇌하기, 다리미로 피해자를 구타한 후에도 '널 사랑하기 때문'에 떠나지 않는다는 가해자, 점점 자기가 누구였는지 잊어가며 고립되는 피해자, 결국 살점이 뜯기는 폭력이 발생한 후에야 피해 여성은 그 굴레를 박차고 나온다. 이 과정들을 지켜보노라면 그림 속에서 여자 주인공을 얼른 끄집어내고픈 충동이 인다. 자신이 누구였는지 잊었던 피해자는 "재건의 고된 작업"이 필요했다. 피해자만큼 '재건'이 필요한 인물은 가해자지만 가해자를 변호하는 이들은 그의 '인간되기'를 방해한다.

세상을 어떻게 해석하느냐, 무엇을 할 것인가, 다 좋다. 다만 그 이전에 필요한 질문은 도대체 자신이 누구이며 무엇을 하는 생명체인가, 그것이다. 바뀌지 않는 '나'들이 바꾸려는 대상과 세상은 무엇이며 어디에 있나. 자신이 누구인지도 모르면서 타인을 품평하고 세상을 논하는 자들이 주변을 피폐하게 만든다. 이들은 제 주변의 약자를 자기 자신이 누군지 모르는 상태로 이끈다. 오사의 애인은 끊임없이 오사에게 바뀔 것을 요구했다. 날 미치게 만들지 마, 넌 바뀌어야 해, 왜 넌 변하지 못하는 거야… 여성은 악의 유발자이며 동시에 악의 배출구다. '맞아야 할 이유' 혹은 '때릴 수밖에 없는 상황'은 얼마든지 만들 수 있다.

슬프게도 사람은 잘 바뀌지 않고, 스스로를 바꾸는 일은 영구적 고행이 없으면 불가능하다. 다행히도 오사가 당하던 폭력에 '결'(결말)이 가능한 이유는 가해자가 바뀌었기 때문이 아니다. 피해자 오사를 도와줄 수 있는 학교 교수, 말을 제대로 알아듣는 의사와 경찰 등이 있어서다. 바꿀 수는 없어도, 폭력을 격리시키거나 약화시킬 수는 있다.

개인적인 것은 저절로 정치적인 것이 되지 않는다. 더 많은 개인들의 사회적 고발을 지지한다.

이라영 예술사회학 연구자

<한겨레 인기기사>■ [만평] 병원·쇼핑·물·공주놀이… 박 대통령 언제까지?[포토] 나는 네가 지난 밤에 한 일을 알고 있다…'떡실신'"더 이상 못 참아"…홍준표 '주민소환' 첫 도지사 될까[포토] 한국전쟁 65주년…컬러사진으로 본 역사의 현장[화보] 집이야 성이야?…'억!~' 소리 나는 스타들의 대저택

공식 SNS [통하니][트위터][미투데이]| 구독신청 [한겨레신문][한겨레21]

Copyrights ⓒ 한겨레신문사,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한겨레는 한국온라인신문협회(www.kona.or.kr)의 디지털뉴스이용규칙에 따른 저작권을 행사합니다.>

Copyright © 한겨레.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