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적]조선업의 몰락

안호기 논설위원 2015. 7. 30. 2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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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그룹 창업자인 고 정주영 회장이 1970년대 초 영국 선박회사 애플도어의 롱바톰 회장을 만났다. 조선소를 짓기 위한 차관을 들여오려면 추천서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제대로 된 조선소 하나 없는 개발도상국 건설회사(현대건설)에 선뜻 추천서를 써줄 리가 만무했다. 정 회장은 거북선 도안이 들어간 500원권 지폐를 내보이며 “우리 거북선이다. 영국의 조선 역사는 1800년대부터지만 우리는 1500년대에 철갑선을 만들어 일본을 혼낸 민족이다”라고 설득했다. 정 회장은 추천서를 받았고, 울산 미포만에 조선소를 건립할 수 있었다.

뒤늦게 뛰어들었어도 한국 조선업은 눈부시게 발전했다. 조선업 부동의 1위였던 일본을 제치고 1990년대 중반 선두로 뛰어올랐고, 십수년간 점유율 1위를 지켰다. 2008년 수주잔량 기준 선박회사 순위에서 한국은 1~5위를 독식하며 톱10에 7개가 포진했다. 조선업은 수출 의존도가 높은 한국 경제에서 효자였다. 전체 수출액 중 선박 비중은 1990년대 5% 안팎에서 꾸준히 늘어나 2009년과 2010년 10%를 웃돌았다. 1995년부터 지난해까지 20년간 선박 누적무역수지는 4221억달러로 같은 기간 전체 누적무역수지(3722억달러)보다 많다.

그랬던 조선업이 휘청거리고 있다. 저가 공세를 편 중국에 밀려 2012년부터 1위 자리를 내줬다. 최근에는 해양플랜트 부문 손실이 눈덩이처럼 불어나 대규모 구조조정이 불가피해졌다. 현대중공업·삼성중공업·대우조선해양 등 빅3의 올해 손실이 10조원에 이를 것이라는 분석도 나온다. 바다에서 석유나 가스를 시추하고 생산하는 최첨단 고부가가치 설비인 해양플랜트는 조선업의 미래 먹거리로 각광받았다. 하지만 설계와 주요 장치는 모두 외국에서 사와 조립하는 수준이었다. 빅3가 과당경쟁을 벌이는 바람에 수익성도 크게 떨어졌다. 소 잃고 외양간 고치는 격이긴 해도 국내 조선업계가 해양플랜트 설계 능력을 키우고 기자재를 국산화하는 노력을 벌인다고 한다. 지금까지의 손실은 수업료 낸 셈 치고 물량뿐 아니라 기술에서도 해양플랜트 1위로 도약해야 한다. 한국은 영국보다 300년 앞선 전통을 갖고 있고, 백사장에서 기적을 이룬 조선 강국 아닌가.

<안호기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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