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해 분산성 동문지 통일신라시대부터 조선후기까지 사용 확인

2010. 12. 31. 14: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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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해시는 분산성(사적 제66호)의 학술적 성격을 구명하고 복원계획을 수립하기 위해 동아세아문화재연구원에 의뢰하여 실시한 기초 발굴성과를 12월 28일 현장지도위원회를 열어 공개하였다.

이번 발굴조사는 분산성 복원정비사업의 일환으로 동문지의 존재 및 규모와 구조를 밝히고 향후 정확한 정비 및 복원의 기초자료로 활용하기 위해 실시하게 되었다.

조사결과, 동문지 추정부지에서 통일신라시대 체성외벽부, 고려후기 문지(門址, 문이 있던 자리), 조선후기 문지가 확인되었다. 초축단계의 체성은 '바른층쌓기'의 삼국시대 산성축조수법으로 쌓여졌으며 이후 총 2차례 걸쳐서 수·개축이 이루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고려후기의 문지는 암문(暗門)형식과 옹성(甕城)형식이 결합된 구조이며 이후 붕괴면을 정지하여 조선 후기까지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조선후기 문지는 성내부 측으로 진입하면서 굽어지는 형태를 띠며, 상부는 아치형 구조를 가진 것으로 추정된다.

현장을 관찰한 지도위원들은 고식(古式) 기와류가 출토되는 것과 체성 하단부에서 고식 산성 축조수법을 쓴 것으로 미루어 가야시대에도 문지가 있었을 것으로 판단된다며 추가로 정밀발굴조사를 실시하고 이를 바탕으로 복원을 추진할 것을 당부했다.

한편 분산성은 만장대(萬丈臺)라는 애칭으로 불리는 김해의 진산(鎭山)인 분산 정상부를 두르는 테뫼식 산성으로 고려말 박위 부사가 대마도 정벌을 위해 옛 산성을 고쳐 쌓았다는 기록이 있으며, 이후 조선후기 흥선대원군의 명으로 김해부사 정현석이 다시 산성을 수리하여 쌓았다고 한다. 이번 발굴결과 문헌기록과 정확히 일치하는 고려말과 조선후기의 산성 보수 흔적이 확인되어 학계의 큰 관심을 끌고 있는데, 이처럼 분산성을 왕조마다 수차례 보수 축조한 것은 이 산성이 김해지역 방어에 지대한 역할을 한 지정학적 위치를 가지고 있었음을 증명한다. 또 향후 추가 조사 결과에 따라 초축 연대가 가야시대까지 시기가 올라 갈 수도 있어 더욱 중요한 학술적 가치를 지닌다.

이에 김해시는 드라마 '김수로'의 세트장으로 유명한 가야역사테마파크와 천문대 등과 연계하여 분산성을 가야문화 관광지로 개발하기 위해 매년 지속적으로 성곽을 보수 정비하고, 내부의 건물 등을 복원할 계획이다.

(끝)

출처 : 김해시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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