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씨 왕조-김씨 왕조'의 남북조시대도 아니고..

2014. 11. 3. 16: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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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40년만에 서울에 재등장한 추억의 '삐라'…체감하는 표현의 자유는 그때보다 '한파'…대통령 한마디가 초헌법적 권능인 시대…대북전단 남북 입씨름은 왕조시대 방불

곽병찬 대기자가 박근혜 대통령에게 보내는 편지 80

엊그제 서울 지하철 2호선 홍대입구역 인근 건물에서 삐라가 쏟아졌습니다. 4000여장의 삐라가 하늘을 나는 광경은 시민들에게 색다른 눈요기이자 경험이었을 겁니다. 지난달 20일 팝아티스트 이하씨가 광화문빌딩에서 뿌린 것과 같은 전단이었습니다. 첫 살포 때는 이씨와 뜻을 같이하는 동료들이 신촌 등 서울 시내 곳곳에서 2만여장을 뿌렸다고 합니다.

삐라의 시대가 떠올랐습니다. 학내나 공단 주변에서나 뿌려지던 삐라가 광화문 사거리까지 진출했던 유신정권 말기가 그런 시대였습니다. 진실을 전하는 유일한 매체가 삐라였던 시절.

긴급조치 9호는 국민의 입에 재갈을 물렸습니다. 유신헌법을 비판해서도 안 되고, 찬반토론을 해서도 안 되며, 대통령은 물론 긴급조치 자체를 비난해서도 안 되고, 정부기관을 비방하는 보도를 전해서도 안 되고. 긴급조치 사범을 체포하고 구금하는 데는 법원이 발부하는 영장도 필요 없었습니다. 눈에 띄는 대로 잡아 시한도 없이 지하실에 가둬둘 수 있었습니다. 대개 그렇게 붙잡히면 고문을 피할 수 없었죠.

그런 시절 무엇으로 이 나라의 실정과 상황, 사실과 진실을 전할 수 있었겠습니까. 언론의 자유를 주장했던 기자들이 수백명씩이나 해직되고 체포되던 시절인데. 오로지 삐라뿐이었습니다. 나치 치하에서 뮌헨대 학생들의 '백장미단'이 그랬듯이 전단을 돌리는 것이 유일했습니다. 그 삐라 한번 날리기 위해 당시 대학생들은 제적은 물론 구속과 고문을 각오해야 했습니다. 백장미단처럼 처형당하지는 않았지만, 학생들로서는 일생일대 도전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정보기관은 귀신같이 그런 모의를 적발했습니다. 도청이나 감청은 물론 가난한 학생들을 포섭해 염탐하도록 했습니다. 때문에 시위 주동 학생들은 사전에 잡히거나, 사찰을 피해 학생들 앞에 섰다 하더라도 '학우여!' 이 세 글자가 끝나기도 전에 체포되기 일쑤였습니다. 삐라는 학내에 죽치고 있던 형사들에 의해 곧바로 수거됐습니다. 어떻게 하면 주장을 널리 알리고 삐라를 더 많은 사람이 공유할 수 있도록 하는가의 문제가 학생들에겐 가장 큰 고민이었습니다.

그래서 나온 기발한 아이디어 가운데 하나가 시내버스가 정차할 때 차 천장 환기통 밖에 유인물을 놓고 내리는 것이었습니다. 차가 떠나면 삐라가 날리기 때문에 차 안에 형사만 없다면 검거를 피하기 쉬웠습니다. 유신 말기 삐라가 광화문 네거리에 뿌려질 수 있었던 것은 이 방법 덕분이었습니다. 물론 형사들이 광화문 등 웬만한 정류장엔 아예 죽치고 있게 되면서 시들했지만, 그렇게라도 해야 정권의 야만성을 세상에 조금이나마 알릴 수 있었습니다.

그런 삐라가 40여년 뒤에 다시 서울 시내에 등장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을 뜻하는지는 새삼 말할 필요도 없을 겁니다. 물론 유신이나 5공 시절보다 정보를 전달할 수 있는 수단은 많아졌고 제약도 줄었습니다. 그러나 표현의 자유에 대한 체감온도에선 그때나 지금이나 다를 게 없습니다. 누리던 것을 박탈당했으니, 어쩌면 체감온도는 더 낮을 수도 있습니다. 특히 온라인에 대한 실시간 감청이 공언된 이후 불안감은 더 커졌습니다. 사실 권력기관은 마음만 먹으면 무엇이든 엿듣고 들춰볼 수 있었습니다. 특히 카톡 등 사회관계망서비스로 친구들에게 이런 의견을 전파했을 경우, 당사자는 물론 온라인 친구까지도 샅샅이 사찰을 당하게 됩니다. 그러니 삐라 외에 무슨 도리가 있겠습니까.

게다가 정권에 불리한, 특히 대통령에 관한 의혹을 제기하는 메시지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사법처리 혹은 불이익을 주고 있습니다. 이하씨는 삐라를 살포하던 현장에서 체포됐습니다. 혐의는 '건조물 침입죄'였습니다. 미네르바를 잡을 때 적용했던 것이 명예훼손 등 형법 규정이 아니라 '전기통신기본법'이었던 것과 같습니다. '반의사 불벌죄'인 명예훼손에 대해서도 피해자의 뜻과 관계없이 국가기관이 자의적으로 판단해 수사하고 처벌하겠다고 하고 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대통령과 이 정부는 대북 전단에 대해서는 헌법상 권리인 '표현의 자유'를 규제할 수 없다고 거듭 천명했던 터였습니다. 아무리 근거없는 내용이라 해도 규제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고 보니 이하 작가를 무작정 체포하거나 형사 입건할 수는 없는 일이었습니다. 대통령은 이희호 여사 앞에서 '삐라를 막을 근거가 없다'고 또박또박 말하기도 했습니다. 자가당착, 스스로 제 발을 묶어버린 것입니다. 건조물 침입이라는 황당한 혐의를 적용해 이하씨 등을 체포한 것은 그런 까닭이었습니다.

사실 이씨의 수배 전단 내용은 별게 아니었습니다. 머리에 꽃을 꽂은 박근혜 대통령이 색동저고리 입고 등장하고, 전단 위와 아래에 영어로 '수배' '미친 정부'라고 적혀 있을 뿐입니다. '조선일보'는 그걸 두고 대통령을 '광녀'라고 했다고 흥분했지만, 다른 사람들은 대통령을 영화 <웰컴투 동막골>의 사랑스런 강혜정처럼 그렸다고 불만이기도 합니다. 강혜정씨는 순정한 정신지체아로 등장했지만 영화 속에서 가장 사랑받는 캐릭터였고, 분단과 전쟁의 무죄한 희생양이자 통합의 아이콘이었습니다.

사법부라도 정상이라면 사법정의를 믿고 손쉬운 매체를 이용했을 겁니다. 그러나 사법부는 이미 유신체제 아래서의 그 '자판기 재판부' 시절로 반쯤 돌아갔습니다. 대법원은 최근 유신체제 아래서 긴급조치에 근거한 수사나 재판은 위법하지 않다고 판결했습니다. 이미 앞선 정권에서 긴급조치는 위헌이고 무효라고 판단했던 터였습니다. 지금 대법원은 약사가 독극물인 줄 알지만 의사 처방전에 따라 처방했으니 약사에겐 아무 잘못이 없다고 하는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사람이 죽었는데도 말입니다. 이 주장에 따르면 나치 전범, 일제 전범들이 유대인을 학살하고 생체실험을 했어도 그건 그 나라의 법과 행정조처에 따른 것이니 집행한 자들에게는 벌을 줄 수 없다는 것과 같습니다.

아돌프 아이히만은 2차 세계대전 중 유럽 각지의 유대인의 체포와 강제이주, 그리고 학살을 기획하고 집행했습니다. 그는 16년 동안 숨어 지내다 붙잡혀 전범재판에 회부됐지만, '나는 정부의 조처와 명령에 따랐을 뿐'이라며 한사코 무죄를 주장했습니다. 물론 전범재판소는 그에게 사형 선고를 내렸습니다. 그러나 지금 대한민국 대법원이 재판을 맡았다면 그는 전혀 다른 판결을 받게 되었을 겁니다. 아이히만은 당시 법과 지침에 따라 명령을 수행했기 때문입니다.

물론 대통령이 시킨 일은 아닐 겁니다. 그러나 이 정부가 들어서면서 이 나라의 국가기구는 이렇게 끝없이 타락하고 있습니다. 가장 똑똑하고 공부 잘한다는 자들이 스스로 바보 천치임을 천명하고, 입만 열면 사법정의와 양심을 떠드는 자들이 권력의 하수인임을 선언하기에 이른 것입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한 사람이 그렇게까지 망가뜨릴 수 있으니 말입니다. 하긴 나치의 헌법과 다를 게 없는 유신헌법을 기초하고, 북한의 형법 내용과 다를 바 없는 긴급조치도 성안하고, 권력의 지시에 따라 국민 주권을 박탈하고 인권을 유린하는 수사를 하고 재판을 한 것도 바로 그들과 같은 부류였으니 어려운 일은 아니었을 겁니다.

앞으로 다시 군사정변이 일어나고 총 든 군인들이 멋대로 헌법을 만들고, 저희들끼리 법을 제정하고, 나아가 헌법과 법을 초월하는 긴급조치를 선포했을 경우 이 나라 경찰, 검찰, 정보기관 그리고 사법부가 어떤 짓을 할지 생각만 해도 끔찍합니다. 40년 전 지금 당신의 비서실장이 그 토대를 마련한 유신체제는 그래도 순진했습니다. 민주주의와 천부인권을 짓밟는 헌법을 제정하고, 그런 헌법마저 유린하는 긴급조치를 남발했지만, 국민을 체포하고 고문하고 징역에 처할 때 그 근거를 마련하려고 나름 조금은 고민했으니 말입니다. 그러나 이제 당신의 한마디가 법이 되고 긴급조치가 되고 있습니다. '대통령에 대한 모독이 도를 넘었다.' 당신의 이 한마디는 그야말로 초헌법적 권능을 행사하고 있습니다. 사생활을 샅샅이 뒤지고, 표현의 자유를 마음대로 유린하게끔 하고 있으니까요.  

엊그제 북한 조선평화통일위원회가 이 정부의 '최고 존엄'을 자극했다는군요. 정부 지원을 받는 단체들이 북쪽 김정은 제1비서를 능멸하는 삐라를 또 살포하자, '배후 주모자는 박근혜'라고 비난했다는 것입니다. 사실 대북 전단에 담긴 '김정은 비방'에 비하면 자극이라 할 것도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통일부는 발끈했습니다. "북한이 우리 대통령을 실명으로 비난하고… 하는 것은 국제 규범상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언동"이라는 것입니다.

왜 그렇게 닮아가는지 모르겠습니다. 상대방을 비난하는 것은 괜찮고 저를 비난하는 것은 용납할 수 없는 언동이니, 서로가 싸움밖에 할 게 없습니다. 이러면서 무슨 통일 시대, 평화통일, 통일대박 따위의 말을 입에 올릴 수나 있는 것인지…. 북이야 김씨 왕조가 이어지고 있다고 해도, 남도 또한 박씨 왕조처럼 해서는 안 되는 것 아닙니까?

곽병찬 대기자 chankb@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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