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향·한겨레의 '균형강박증', 뭐하자는 걸까요

입력 2011. 8. 16. 14:39 수정 2011. 8. 16. 14: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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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오마이뉴스 기자]

아홉 가지를 잘 했는데 한 가지를 잘못했다고 몽땅 싸잡아 열 개를 다 잘못한 것으로 비판받는 것처럼 열받는 경우도 없다. 특히 앞으로나 뒤로나 꽉 막힌 상황에서 홀로 적진에서 싸우고 있다는 비장감이 넘칠 때 더욱 그렇다. 그것도, 죽을 힘을 다 해 뛰고 있는 판인데 남 말하듯 "그래도 뭔가 2% 부족하다"는 섭섭한 소리를 들으면 다리에 힘이 쭉 빠질 노릇이 아닐 수 없다. 억하심정이 나지 말라는 법이 없다.

일부 누리꾼들이 아주 가끔씩 경향신문이나 한겨레의 보도가 못 마땅한 나머지 욕설 가까운 비판을 퍼 붓거나 아예 불매운동, 불독운동 수준으로까지 치달을 때마다 그에 대한 반대의 글을 쓰거나 하다못해 댓글이라도 올려 말리곤 했던 이유다. 하나를 탓하기 전에 아홉 개 잘 하는 걸 다행으로 여기고, 2% 부족한 건 우리 독자들이 챙겨줘야 한다는 믿음이 있다. 삐뚤어진 뿔이 보기 싫다고 소 자체의 귀중함이 덜 한 건 아니다.

극우논객 모시기가 과연 균형일까

류근일 전 < 조선일보 > 주필

ⓒ 남소연

그런데 며칠 전 존경하는 언론계 선배 한 분에게서 전화가 왔다. 경향신문에서 오피니언면을 더 깊고 더 넓게 꾸민다면서 류근일을 필진의 한 사람으로 모셨다는데 알고 있느냐는 말씀이셨다.

"알다마다요, 1면에 사고로 나왔던데요."

"도대체 누가 칼럼 쓰는 사람들을 결정하는 거지?"

"편집국 주요 부서 간부들하고 논설실 간부들한테 추천받아서 편집국장이나 논설주간이 결정하는 거 아니겠어요?"

"아니, 그런데 어떻게 류근일 같은 사람을 경향신문에 칼럼을 쓰게 한대?"

"아마 조선일보가 가끔 진보쪽 분들 글 쓰게 하는 것처럼 경향에서도 진영논리를 벗어나 다채로운 시각을 보여주려는 것 아니겠어요? 알림기사에도 그렇게 나왔던데요."

그런데 내 답변이 선배의 부아를 더 돋은 모양이다.

"아니 조선일보가 다채로운 시각 보여주려고 진보쪽 사람들 글 쓰게 하는가? 그리고 지금 경향이 조선일보 흉내낼 땐가? 그런 형편이야? 온통 세상이 보수쪽 소리만 요란한데 꼭 경향을 통해서까지 보수소리를 들어야 하나? 그리고 왜 하필 류근일이야?"

"보수쪽 인사로는 그래도 글을 제대로 쓰고 제일 유명한 사람이기 때문에 그런 것 아니겠어요?"

"그럼 경향이 이것 저것 가리지 않고 유명한 사람 글 실어서 신문장사 해 먹겠다는 거야? 그리고 류근일이 글이 그게 글이야? 궤변이고 억지지. 조선에 쓰니까 그런 엉터리가 유명하게 된 거 아니야? 그걸 경향이 받아 먹겠다는거야?"

"꼭 그런 의도까지야 있었겠어요? 나름 신문으로서의 균형을 맞춰 보려는 거겠지요."

내가 오랫동안 경향신문에 재직했던 죄로, 선배에게서 일방적인 화풀이를 당하고 변명한 것처럼 됐지만 나 역시 경향이 류근일을 외부칼럼진에 포함시켰다는 알림기사를 보고 적지않은 충격을 받은 것이 사실이다. 나는 그동안 경향, 한겨레와 몇몇 인터넷 신문을 통해서만 세상 돌아가는 형편을 짐작해 왔다.

말하자면 내가 애써 피해 다니던 류근일을 내 뜻과 전혀 다르게 경향에서 또 만나게 됐다는 소식에 처음에는 놀라고 불쾌하기도 했지만, 이 참에 부족한 보수쪽 시각을 보충할 수 있게 된 것도 복이 아니겠느냐고 금방 마음을 바꿔 먹기로 했다. 이처럼 치명적인 결정을 내리려면 충분히 사내 논의도 거쳤을 테고 외부 반응을 타진하는 사전노력도 있었지 않았겠나 하는 너그럽게 양해하는 마음도 있었다.

하지만 칠순이 훌쩍 넘은 노선배, 자신 뿐 아니라 주변 사람들(물론 귀하디 귀한 소수의 70대 진보적 언론계 분들이 전부이겠지만)이 다 그렇게 노여워한다는 노선배의 전화를 받고는 내 변명 비슷한 것이 '경향을 끊으려야 끊을 수 없는 처지'에서 나온 자기합리화에 불과하다는 깨달음이 번쩍 들었다. 따지고 보면 더 이상 류근일 같은 극우논객들의 역겨운 글을 접하기 싫어 '조중동'을 담배 끊듯 끊은 내가, 그러고도 세상물정에 전혀 어둡지 않은 내가 새삼 경향을 통해 그의 궤변과 억지를 읽으며 짜증을 낼 이유가 뭔가.

류근일 대신, 내가 더 자주 보고 싶은 경향의 칼럼니스트가 있고, 경향에 쓰고 싶어도 불러주지 못해 못 쓰는 더 훌륭한 진보논객들이 있지 않은가. 그러므로 내가 후배들에게 이번 결정을 다시 한번 생각해 보라고 요구하기로 결심한 건 선배로서가 아니라 최소 35년 충성독자의 당연한 결론인 것이다.

박근혜에게 더 가혹한 잣대 필요할 수도

말이 나온 김에 < 한겨레 > 에 대해서도 한마디 해야겠다. 12일자 성한용 선임기자의 대선주자탐구 박근혜 편에 대해서다. 대선주자급 정치인들에 대한 관심이 높아가고 있는 상황에서 유력한 대선주자로 거론되는 몇몇 정치인들이 과연 대통령이 될 수 있는 최소한의 자격은 갖춘 것일까 관찰을 시도해 보기로 했다고 했다. 그리고 그 첫 번째로 박근혜를 택한 것이다.

대선이 대한민국의 모든 것을 빨아 들이는 '블랙홀'로 작동하고 있는 상황에서, 특히 철 빠른 추석이 한 달도 채 남지 않은 상황에서, 지금쯤은 얼핏 윤곽이 드러난 후보들(깜도 안 되는 오세훈은 제 풀에 나가 떨어졌지만)을 추려 '맛있는 안줏감'을 제공하겠다는 기획의도야 칭찬할 만하다. 이른바 '대세론'의 주인공인 박근혜를 첫 대상으로 삼은 것도 당연하다.

하지만 이런 큰 기획, 논란의 여지가 있는 기사일수록 취재가 충실해야 한다. 그런데 박근혜 기사를 찬찬히 읽어 보면 취재가 태부족했다는 사실이 금방 드러난다. 기사에 인용된 취재원들을 보자.

성한용 < 한겨레 > 기자가 쓴 '대선주자 탐구' 박근혜편 기사

'(박근혜의) 한 측근' '(박근혜를) 보좌한 경험이 있는 한나라당 인사' '(박근혜를) 가끔 만나는 정책전문가' '(박근혜의) 주변 인사' '(박근혜의) 다른 주변 인사' '(박근혜와) 가까운 한 인사' 가 거의 전부다. 그밖에 인용된 것이 또 '(박정희정권) 당시 청와대 관계자' 혹은 '청와대 담당 비서관' 이고 '김재원(영남대 교수, 전 한나라당 의원)' '최필립(정수장학재단 이사장)' '성병욱(전 중앙일보 청와대 출입기자)' 등 실명 인용된 극소수 인물들 역시 박근혜와 밀접히 연결된 인물들 뿐이다. 딱 봐도 얼마든지 특정 이야기를 집단창조해낼 만한 인적구성이다.

이런 인물들의 '증언'만을 토대로 글을 쓴다는 것은 위험천만한 일이다. 차라리 안 쓰느니만 못 한 것이다. 그런데 이 기사가 그랬다. 이런 이들의 증언만을 토대로 글을 쓰다 보니 "(개인적인 이해나 욕망, 욕심을 혐오하는 박근혜 전 대표의 특징은) 아버지에게 물려받은 선천적인 것으로 본다"느니, "내용에 대해 충분히 숙지하고 대하면 박 전 대표는 얼마든지 알아듣고 받아들이는 훌륭한 학생"이라느니, "그를 여자라고 우습게 생각하는 사람은 반드시 당하게 되어 있다. 그는 경륜이 있는 정치 지도자다"라느니, "박근혜 전 대표가 대통령이 되면 박근혜 정권이 되는 것이지, 친박정권은 되지 않을 것"이라는 말들이 버젓이 등장하는 낯뜨거운 기사가 되어 버리는 것이다.

논리의 비약이 심한 발언들이 정제되지 않고 등장하는 건 당연한 결과다. "개인적인 이해나 욕망, 욕심을 혐오하는 박근혜의 특징이 아버지 박정희에게 물려받은 선천적인 것으로 본다"고? 이기주의나 출세주의, 영웅주의, 혹은 기회주의같은, 박정희의 생애를 일관하는 성격적 특성들이 부계로부터 생물학적으로 물려 받을 수 있는 기질들인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아무리 국가주의 정신이 한국적 정치풍토에서 장점으로 받아들여진다 해도 어떻게 '전체를 위해 개인을 희생한다'는 신념체계가 자식에게 '선천적으로' 물려질 수 있는가.

박근혜가 79년 부마항쟁 당시 공수특전단 철수에 개입했다는 얘기가 사실이었다고 기자가 단정하는 대목도 마찬가지다. 당시 매주 한 두 차례 청와대 출입기자들과 테니스를 치던 박근혜가 기자들의 건의를 듣고 아버지에게 공수특전단 철수를 건의했다는 아름다운 이야기다. 아버지 박정희가 듣지 않자 그 자리에서 바로 비서관에게, 차지철에게 특전사 철수를 지시하도록 해 결국 관철시켰다는 대목에 이르면, 잔다르크 짐쪄 먹을 더욱 아름다운 이야기가 된다.

성한용 기자는 이 이야기가 박근혜 전 대표가 2002년 대선을 앞두고 미래연합을 창당했을 때 운영위원들의 입을 통해 처음 흘러나온 것임을 밝히고 '큰 영애 보좌'를 주임무로 하던 공보비서관, 당시 중앙일보 출입기자로부터도 확인했음을 암시하고 있다. 하지만 기사는 확인하고 증언하는 사람이 많다고 크로스체크가 완결되는 것이 아니다. 이 사람들, 한결같이 박근혜에 가깝게 있었거나 입을 모아 영웅을 만들어내면 조연으로나마 칭송을 받아 먹을 수 있는 위치에 있는 것이다.

각색의 냄새가 물씬 풍기는 이 이야기대로 만일 차지철이 일개 비서관의 연락만 받고 주군에게 확인도 하지 않은 채 정병주 특전단 사령관에게 철수를 지시한 것이 사실이라면, 며칠 후 궁정동 술자리에서 "데모 대원 1~2백만 명 정도 죽인다고 까딱 있겠습니까?"라고 호언장담하다가 총맞아 죽었다는 차지철은 분명 다른 사람인 것이다.

한겨레가 진보에 쏠린 채 균형을 포기하라는 말이 아니다. 상대를 무조건 씹으라는 것도 아니다. 균형과 객관, 그리고 절제는 신문의 힘이요, 무기다. 하지만 박근혜에게 손학규, 문재인, 유시민, 한명숙 등과 같은 지면을 할애한다고 제대로 된 균형을 이루는 것은 아니다. 최소한 조중동 등 수구족벌언론들이 야당 후보자들에게 들이대는(또는 들이 댈 것으로 예상되는) 그런 정보력과 분석틀을 동원해 박근혜를 좀 더 비판적으로 철저히 해부했어야 한다는 얘기다. 그것이, 보수-진보의 균형이 완전히 무너진 이 시대 진보언론이 취해야 마땅한 스탠스라고 나는 믿는다.

물론 박근혜는 접근하기 어려운 인물임이 틀림이 없다. 오랫동안 수구세력들에 의해 보호받으며 그에 대한 진실은 가려진 채, 미화되고 과대포장된 이미지만 끊임없이 재생산된다. 반대파가 정보를 얻을 수 있는 길은 원천적으로 막혀 있고 측근들로부터 나오는 이야기들은 철저히 선택되고 고쳐진다. 박근혜에 대한 정보가 그렇게 통제되고 제한되어 있다는 자체가 '박근혜의 문제'다. 한겨레가 정면돌파를 감행해야 하는 지점이 바로 거기인 것이다.

진보적 사고방식에 더 충실해야

진보언론을 통해 독자들이 알고 싶고 안줏감 삼고 싶은 건 박근혜가 박정희 시절, 잘못된 것을 주로 아버지에게 건의했고 심지어 부가가치세 도입에 대한 부정적 여론, 김영삼 신민당 총재 직무집행정지 가처분 및 의원직 제명이 잘못된 것이라는 의견도 아버지에게 전달했다는 따위의 가공된 무용담이 아니다. 더구나 그의 그런 '임무'가 어머니(육영수)로부터 물려받은 것이라는 터무니없는 핏줄 자랑을 통한 공작적 이미지의 대물림도 아니다.

우리가 한겨레를 통해 얻고 싶은 것은 박근혜의 국가주의가 왜 시대착오적이며 어떻게 민주주의에 대한 흉기로 돌변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인지에 대한 심층분석이다. '4대강 죽이기' 등 엄중한 현안에는 침묵하고 "복지는 돈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 관심이 우선"이라는 무지의 연원에 대한 단서다. "동생이 아니라고 하면 그걸로 끝"이라는 독선과 그의 주변에 포진한 인물들에 대한 더 많은 취재를 통해, 그가 집권할 경우 '5, 6공 악령들'이 부활하고 '부라퀴들의 천하'가 도래할지도 모른다는 막연한 공포를 공개적 토론의 장으로 끌어낼 수 있을 정도의 정보와 글쓴 이의 강단인 것이다.

바둑에서도 흉내내기는 필패라고 했다. 같은 훈련량이라면 약점을 보완하는데 쓰지 말고 내가 잘하는 주무기를 강화하는데 전력을 쏟으라는 것도 스포츠계의 증명된 교훈이다. 나는 경향이나 한겨레 등 진보언론에 대해, 제발 좁은 테두리에서의 산술적 균형이라는 강박관념에서 벗어 나라고 다시 한번 충고하고 싶다. 저들과 비슷한 생각을 하고 기획을 하고, 저들과 비슷한 방식으로 필진을 구성하고 기사를 쓰면 만날 그 프레임에서 놀아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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