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들 죽여 사체 '돼지고기'로 팔았다

안호균 입력 2011. 2. 5. 18:46 수정 2011. 2. 5. 18: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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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뉴시스】안호균 기자 = 무참하게 사형이 가해지고 배고픔에 어머니가 친자를 살해하기도 하는 북한 수용소의 참상이 한 탈북 여성의 증언으로 인해 알려졌다.

5일 대중국 라디오방송 '희망지성 국제방송'(SOH)에 따르면 탈북 여성 김혜경씨는 3일 캐나다 의회 인권분과위에서 북한 수용소에 수감됐던 자신이 겪은 일에 대해 증언했다.

김씨는 북한 제18수용소에서 인생의 대부분을 보냈다. 그녀의 가족은 모두 그녀의 할아버지가 6.25 전쟁 당시 실종됐을 때 북한 당국의 블랙리스트에 올랐다.

김씨의 가족들은 수용소에서 4세대를 살았다. 그동안 상상하기도 힘든 독재가 이뤄지고 있던 수용소에서는 상당수의 수감자들이 사망했다.

그녀는 "여러분은 저희가 살던 집을 집이라고 할 수 없을 겁니다. 짐승들이나 살 집이죠"라고 말했다.

수용소에서의 생활은 배고픔을 넘어 구타와 죽음의 위협이 늘 상존했다. 채소 절도에서부터 아동 살해까지 갖가지 죄목으로 공개 사형이 보편적으로 이뤄졌다.

28년 동안 수감돼 있으면서 김 씨는 죽고 싶어 자살을 기도하다 실패하기도 했다. 또 그녀가 속한 수감자 계층을 증오하는 다른 수감자들이 뱉은 침을 강제로 삼켜야 하는 모욕도 당했다.

수감자들이 먹던 옥수수죽은 밀가루에 소금을 좀 넣은 것이었다. 배급량은 광산에서 일하는 수감자들에게는 좀 더 나았지만 많은 사람들은 호흡기 질병을 일으켰다.

근무는 하루 8시간이지만 보통은 12시간에서 16시간까지 지속됐고 그 후에는 동일한 시간동안 먹을 수 있는 식물을 찾아 산을 뒤졌다. 배급되는 깨끗한 물은 충분하지 않았고, 비누도 없었다.

공개 사형은 1994년 김정일이 권력을 잡은 뒤 더 증가했다. 사체들이 길에 너무 많이 쌓이자 이를 처리하는 특별 팀이 만들어지기도 했다.

김씨는 "처음에는 무서웠지만 나중에는 그런 광경이 너무 흔해서 더 이상 두렵지 않았어요"라고 설명했다.

20년 이상 모범 생활을 한 김씨는 2001년 석방됐다. 그녀는 아이들과 수용소를 떠났고 2년 후 아이들은 마을을 휩쓴 홍수에 실종됐다.

그녀는 아이들을 찾아 수개월 동안 북한 전역을 찾아 다녔으며 결국 찾는 것을 포기하고 2005년에 중국으로 갔다.

그녀는 중국 상인에게 팔린 24살과 27살의 두 여성과 함께 브로커를 통해 중국으로 떠났다. 하지만 50살이 넘어 보이는 김 씨를 누구도 원하지 않아 그녀는 식당에서 일했다.

그 곳에서 일하는 김씨는 동안 북한 탈주자를 집집마다 수색하고 다니던 공안에게 발각될까 봐 항상 떨었다.

그녀는 "공안차가 지나가는 것을 보면 숨어야 한다"며 중국 공안이 북한 탈주자를 보고하면 5000 위안까지 보상받는다고 증언했다.

후에 식당 주인은 씨돼지를 사기 위해 그녀를 북한으로 돌려보내려 했다. 그는 그녀에게 돼지 10마리를 받은 후 5마리를 더 요구했고 그녀는 시장에서 식당 주인을 기다리다 붙잡혀 북한으로 보내졌다.

다시 수용소로 보내지기 전, 김 씨는 가지고 있던 돈을 모두 가져가기 위해 갖은 애를 썼다. 수용소에서는 돈이 생명이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많은 돈을 그녀의 음부 속에 숨기고 나머지를 삼켰다. 그리고 배변 시 그 돈을 다시 꺼내 썼다고 했다.

김 씨는 2008년 수용소 상황이 더 악화됐다며 한 엄마의 얘기를 소개했다.

그 엄마는 배급된 쌀을 다 먹어버린 아들을 도끼로 살해한 후, 아들의 사체를 토막 내 돼지고기로 팔았다는 것.

김 씨는 그 여성으로부터 그 '돼지고기' 한 토막을 샀다. 김 씨는 그 엄마가 그녀의 아들을 죽인 것을 몰랐고 나중에 들었다고 말했다.

어떤 여성은 자신의 딸이 고열이 나자 나중에 딸을 살해한 후 먹었다는 죄로 사형되기도 했다.

이후 김 씨는 맨발로 수용소를 탈출해 라오스로 도망친 뒤 태국을 거쳐 한국으로 왔다.

그녀는 "매 순간 숨을 쉴 때마다 나는 아직 내 아들과 딸을 생각합니다"라고 말했다. 그녀는 아이들에게 보내는, 부칠 수 없는 편지를 통해 그들에게 따뜻한 밥 한 끼 해줄 수 없었던 것에 대해 사과했다.

그녀는 "너희들을 잊은 적이 단 한 번도 없단다"며 편지를 끝맺었다.

큰 선글라스로 얼굴을 감추고 앞에서 증언을 한 김씨의 가족은 아직 북한에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마리오 실바 자유당 의원은 그녀의 증언을 듣고 "이 증언이 위원회에서 들은 이야기들 중 가장 비극적이고 믿을 수 없는 이야기"라고 말했다.

위원회가 북한인들을 도울 수 있는 방법을 묻자 김씨는 "북한에 가축용 사료를 보내라"라고 했다. 식용을 보내면 절대 인민들에게 돌아가지 않지만 가축용 사료를 보내면 인민들에게 돌아간다고 그녀는 설명했다.

ahk@newsi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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