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볼록거울> 국민교육헌장과 획일사회

2008. 12. 4. 09: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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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연합뉴스) 임형두 편집위원 = "우리는 민족 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이 땅에 태어났다. 조상의 빛난 얼을 오늘에 되살려 안으로는 자주 독립의 자세를 확립하고, 밖으로 인류 공영에 이바지할 때다."

벌써 40년 전의 일이다. 추운 겨울날, 국민교육헌장을 외우지 못해 교실에 갇힌 채 귀가하지 못한 기억이 선하다. 전문 393자를 암기하는 게 당시 국민학교 어린이들에겐 쉽지 않은 일이었다. '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이나 '자주독립의 자세' '반공민주정신에 투철'과 같은 용어들은 그 정확한 뜻조차 잘 모른 채 달달 외워야 했다.

암기력이 좋은 아이들은 그나마 해가 떨어지기 전에 집에 갈 수 있었다. '머리가 투미한 아이들'은 날이 어두워지도록 그 393자를 붙잡고 씨름했으나 결국 손바닥 매를 몇 대 얻어맞고서야 겨우 학교를 벗어날 수 있었다. 물론 이튿날에도 안되면 그 다음날에라도 반드시 외워야 했다. 당시로선 어느 누구 예외없이 통과해야 하는 '국민'의 관문이었다.

한 시대를 풍미했던 국민교육헌장은 1968년 12월 5일 '역사적 사명을 띠고 이 땅에' 태어났다. '반공'과 '민족중흥'이라는 이념이 반포되면서 사실상 국민총동원체제 돌입을 선언한 셈이었다. 반공주의와 민족주의는 쌍두마차로 한 시대를 이끌었다. 국민이 국가에 종속됨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했다. 멸사봉공의 자세로 말이다.

당시 국가는 곧 권력 그 자체였다. 시대는 유신헌법 공포로 이어지면서 국민교육헌장은 대한민국교육의 이념이 됐고, 박정희 대통령의 사진은 학교 교무실은 물론이고 각급 학년 교실에까지 게시됐다.

더불어 전국적으로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성웅화 작업이 이어졌다. 서울 세종로를 비롯해 여기저기에 충무공 동상이 세워졌고, 아산 현충사의 사적보호구역도 크게 확장됐다. 이충무공은 멸사봉공 정신의 표상이었다. 애국심 고취, 반공의식 함양, 조국 근대화는 함께 맞물리며 사회를 국민동원 국면으로 몰고갔다.

이로써 남북대결과 경제성장에 국민의 역량을 총집결할 수 있었다. 국가를 위한 자발적 희생이 가능해졌고, 계급으로 구분되는 내적 이질감은 손쉽게 넘어갈 수 있었다. 이른바 총력안보체제가 가져다준 결실이랄까. 학생들은 걸핏하면 반공웅변대회와 가장행렬에 참가해야 했고, 일반국민들도 반공궐기대회등 국가주도의 정책과 행사에 동원됐다.

국민교육헌장을 만든 이는 철학자 박종홍이었다. 처음엔 시인 이은상이 초안을 작성했으나 시원찮다는 비판을 받고 폐기됐다. 멸사봉공을 강조한 이 헌장은 말미에 붙어 있는 '1968년 12월 5일 대통령 박정희'가 말해주듯 박정희 개인에게 교육의 구심점 지위를 부여했다. 그러나 이는 역사적으로 유신쿠데타의 정신적 전주곡이나 다름없다는 비판을 받았다.

작용이 있으면 그에 따르는 반작용이 있는 법. 국민교육헌장은 일부 진영의 반발에 직면해야 했다. 천황의 절대권력을 정당화하고 천황에 대한 무조건적 충성을 강요했던 일제시기의 '교육칙어'를 그대로 본떴다는 비판이 그것이다. 민주회복국민회의는 1975년 국민교육헌장에 맞서 "우리는 자유와 평화와 정의를 사랑하고 압제와 불의를 거부하는 민주국민이다"로 시작하는 '민주국민헌장'을 발표하기에 이르렀다.

국민교육헌장은 반포 25년 만인 1993년에 역사의 뒷장으로 사라졌다. 교과서는 물론 정부 공식행사에서 더이상 힘을 발휘하지 못하고 과거의 유산으로 밀려났다. 이는 김영삼 대통령의 문민정부 등장과 궤를 같이하는 것이었다.

운명을 다하였으나 국민교육헌장이 주는 교훈은 오늘도 유효하다. 그 헌장이 국가가 국민 위에 서는 획일사회의 상징이었다고 볼 때 어두운 시대의 그림자에서 우리가 완전히 자유로운가라는 의문을 떨쳐버릴 수 없어서다. 사회의 다양성이 획일성의 장벽에 가로막혀 기를 펴지 못한다면 자유와 창의가 기본바탕인 이 시대를 맘껏 호흡하긴 힘들기 때문이다.

물론 우리 사회는 과거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많이 성장하고 발전했다. 중고교 시절의 앨범을 볼 때마다 그 변화상을 실감하곤 한다. 대통령의 초상 사진이 교실 칠판 바로 위에 태극기와 함께 걸려 있는 모습에서 질곡의 한 시대를 다시금 느끼게 된다. 선생님을 만나 거수경례를 할 때마다 '반공' 또는 '멸공'을 외쳐야 했던 게 그 시절이 아니던가. 그래서 지금도 기억에 또렷한 국민교육헌장을 외워보는 마음이 여러 가지로 씁쓸하다.

"반공 민주 정신에 투철한 애국 애족이 우리의 삶의 길이며, 자유 세계의 이상을 실현하는 기반이다. 길이 후손에 물려줄 영광된 통일 조국의 앞날을 내다보며, 신념과 긍지를 지닌 근면한 국민으로서, 민족의 슬기를 모아 줄기찬 노력으로, 새 역사를 창조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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