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힘 없어서 당했다" 깜깜이 행정이 부른 성주의 분노

박은하 기자 2016. 7. 16. 17: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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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사드 도입과정의 실종된 민주주의… 안보문제면 주민 희생 강요해도 되나
사드가 배치될 것으로 알려진 경북 성주군 성주읍의 한 공군 포대가 위치한 산에서 내려다 본 성주. /강윤중 기자

초등학교 1학년 아들과 4살된 딸을 둔 배정하씨(38)는 3년 전 대구 수성구에서 경북 성주군으로 이사했다. 배씨는 아이들이 자연 속에서 마음껏 뛰놀며 자라기를 원했다. 특히 성주읍 경산리에 있는 성밖숲이 마음에 들었다. 읍내 주택가 바로 옆에 수령 300~500년 된 왕버들 59그루가 강을 따라 숲을 이뤄 천연기념물 제403호로 지정된 곳이었다. 성주가 사드(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 배치 지역으로 발표된 13일, 아이는 태권도장에 다녀오더니 울음을 터뜨렸다. “엄마, 이제 더 이상 성밖숲에서 못 노는 거야?” 성밖숲은 사드가 배치될 예정인 성산포대로부터 약 3㎞ 떨어져 있다. 배씨는 이튿날 아이의 말을 그대로 적은 노란 피켓을 들고 언니 배은하씨(41)와 함께 성주군의회 앞에 섰다.

“우리 집이 아파트 12층인데 밤에 불 끄면 방공포대 반짝반짝하는 것이 눈앞에 그대로 보입니다. 거기에 사드가 온다는 말 아닙니까? 제 조카가 다니는 성주여중도 언덕에 위치해 있습니다. 나라의 미래들이 자라는 곳입니다. 안전하다고요? 동물실험도 안 해봤고, 이런 주택가 가까이 배치된 사례가 없는데 어떻게 믿습니까?”

14일 성주군 곳곳에는 ‘사드 배치 절대반대’ 현수막이 걸렸다. 성주여자중학교 학부모회, 바르게살기협의회, 한의사협회, 건설기계협회, 참외 작목반, 부녀회, 새마을회, 동문회 등의 이름이었다. 국방부는 사드가 400m 이상 고지대에 설치되는 데다 각도 5도 위를 향해 수직으로 뻗어나가는 레이더 특성상 주민들에게 미치는 영향은 없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박근혜 대통령은 13일 “사드에 대해 더 이상의 불필요한 논란은 안 된다”고 말하고 몽골로 출국했다. 납득하는 성주 주민들은 거의 없어 보였다. 만나는 주민들마다 사드에 대해 물어보면 격앙된 반응을 보였다. 고령 박씨 집성촌인 성주군 선남면 성원1리 주민들은 마을회관에 있던 박근혜 대통령 사진을 14일 오후 치워버렸다. 성주시장 농협 앞에서는 새마을회에서 사드 반대 서명을 받고 있었다. 오전 10시부터 시작된 서명에 약 3시간 만에 500명이 넘게 이름을 남겼다. 국방부에 전달할 서명이라고 했다. 서명을 하고 가다가 다시 찾아와서 “직원들에게 돌리겠다”고 용지를 두어 장 받아간 직장인들도 여럿 있었다. 초등학생들도 줄을 이어 서명했다.

배은하씨는 “성주 사람들 사드 배치에는 찬성한다더니, 자기 지역에 설치한다니까 반대한다는 말이 가장 억울하다”고 말했다. 배씨는 사드 배치 여론조사 찬반을 묻는 전화를 딱 한 번 받은 적이 있다. 정확히 어느 기관에서 한 것인지는 기억하지 못했다. 정당지지율 등 여러 가지 질문과 함께 사드에 대한 질문이 나왔고 반대를 눌렀다. 질문은 ‘북한의 위협을 막기 위해 사드 배치에 찬성하시겠습니까, 중국의 반발을 우려해 반대하시겠습니까?’라는 식으로 물어본 것으로 기억했다. 주변에 전화 여론조사라도 받아봤다는 사람은 배씨 혼자였다. 성주 주민들의 삶에 큰 영향을 미치는 이 결정은 전문가들이 토론하고 관료들이 정했다. 국회조차도 논의에서 배제됐다. 조정관 전남대 정치외교학과 교수는 “긴급한 결정을 요구하는 외교·국방전략은 모든 사안에서 국민들의 의사를 물어보고 정할 수 없다. 그러나 사드 배치 건은 그런 사안이 아니었다. 논의 기간도 길었는데, 국회에서조차 단 한 번도 제대로 논의된 적 없이 행정부에서만 결정한 것이 문제”라고 말했다.

농협 앞 서명부스 등에서는 사드를 왜 도입해야 하는지에 대한 토론이 벌어지고 있었다. “그런데 사드 왜 도입해야 하는 거지? 꼭 도입해야 하는 건가? 전문가들마다 말이 달라.” 서명장에서 만난 한 50대 여성의 질문에 부녀회에서 활동하는 김씨가 답했다. “JTBC보니까 괌이나 일본이나 다 바다를 향해 있대요. 주민들 사는 데 배치된 곳은 성주밖에 없다고 하더라구.” “꼭 배치하면 서울을 방어하게 배치해야지, 우리나라의 모든 건 다 서울에 있지 않나? 서울도 방어 못하면서 왜 배치하나? 결국 누군가 희생해야 되고 성주가 인구도 적으니까 만만하게 뒤통수친 것 아니겠나?” 참외농사를 짓는다는 박모씨가 소리를 높였다. “이런 말도 있대요. 작년부터 군부대 포들이 죄다 빠져나갔다는 거 아닙니까. 작년부터 이미 결정해놓고 성주 사람 방심시키기 위해 일부러 칠곡, 양산 흘렸다더라.” 정보가 불확실한 상태에서 토론이 진행될수록 주민들의 분노는 커져만 갔다.

군의회 건물 현관에는 김항곤 성주군수와 배재만 군의회 의장이 머리에 띠를 두르고 농성을 하고 있었다. 배재만 군의회 의장은 “성주는 사드에 적정한 지역이 아니다. 적임지가 있을 것이라고 본다”고 말했다. 주민들의 의견은 달랐다. 배은하씨는 “어디에도 사드를 설치하지 말아야 한다”고 말했다. 러시아를 한사코 ‘소련’이라고 말하는 김혜식씨(72)도 “전쟁나면 다 죽는다. 사드로 주민 안전 어차피 못 지키는 거, 아무 데도 설치하지 마라”고 말했다. 읍내에서 만난 박모씨(43)는 “칠곡은 미리 알고 군수가 삭발하고 선수쳤는데, 결국 성주는 그러지 못해서 당한 것”이라고 말했다. ‘신나를 들고 갔어야 한다’는 의견이 잇따랐다. 배치 선정과정에 납득하지 못하고, 힘 없는 지역이라 사드 배치 지역으로 결정됐다는 생각이 주민들의 마음에 모멸감을 준 듯했다. 배정하씨는 “인터넷 보면 ‘성주참외’ 안 먹는다 하고, ‘성주 출신 여자들하고 결혼 안 한다’는 말이 벌써부터 나온다. 성주 주민들만 이기적이라 할 수 있느냐”고 물었다. 배씨는 이 말을 하고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주민들에 대한 ‘낙인효과’는 이미 진행되고 있었다.

장지혁 대구참여연대 간사는 “성주의 경우 엑스밴드 레이더 기지 주변 5.5㎞인 출입금지 구역(Keep Out Zone)에 군청 등 주요 인구밀집지역이 다 포함된다”며 “사드 배치 논의가 진행되는 동안 주한미군이 수차례 성주의 부대를 방문했다는 사실이 확인됐다. 이 사실을 도나 군이 모르지 않았을 텐데, 전혀 정보를 알리지 않고 주민들을 소외되게 만든 것이 절차적으로 가장 큰 문제”라고 말했다.

안전에 대한 불안감, 무시당했다는 모멸감, 의사결정 과정에서 배제됐다는 억울함이 뒤늦게 도가니처럼 섞여 주민들 마음에 부글부글 끓고 있었다. 여론은 점점 험악해지고 있다. 15일 황교안 총리는 한민구 국방장관과 함께 사드 배치의 불가피성을 설명하기 위해 성주를 찾았다가 주민들의 거센 항의를 받았다. 오전 11시30분쯤 경북 성주군청을 찾은 황 총리는 “사드 배치를 미리 말씀드리지 못해 송구하다”며 “주민이 걱정 없이 생업에 종사할 수 있도록 정부가 최선을 다하겠다”고 말했으나 주민들은 물병과 소화기 분말 등을 던져 군청사 안으로 대피했다. 군의회 건물 뒷문으로 나와 미니버스를 타려 했으나 주민들이 에워싸 4시간 동안 대치 끝에 빠져나왔다. 주민들은 전날인 14일 오후 군청 앞에서 촛불집회를 열어 “공항도 필요없다”고 구호를 외치고 군수의 사과를 요구했다. 지역 시민단체의 한 관계자는 “예측 불가능한 민란 수준이다. 서울사람들에게 무시당했다는 분노가 이 지역의 주된 정서”라고 말했다. 이 관계자는 “대형 국책사업 때마다 혐오시설만 지방으로 떠넘기는 사건이 반복되면서 쌓인 분노까지 한꺼번에 터졌다”고 말했다. 조정관 교수는 “불투명한 의사결정 과정에, 참여정부 때도 평택 미군기지나 부안 방폐장 등을 행정부 엘리트들이 일방적으로 결정하고, 주민들의 불만은 ‘괴담’ 등으로 치부하며 강제로 밀어붙인 전력이 있다. 이런 경험들이 쌓여서 불신과 반발을 초래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박은하 기자 eunha999@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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