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위대 행사 열린 힐튼호텔 앞은 조선신궁 있던 자리

김유리 기자 2016. 7. 14. 0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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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사당 밀어내고 지은 황국신민 정책의 본산… 신사 참배 강요 논란도

[미디어오늘 김유리 기자]

일본대사관이 국내 진보·보수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자위대 창설 62주년 기념 행사를 서울 시내 한복판 호텔에서 열었다. 올해 행사 장소는 공교롭게도 일제시기 내선일체를 강조하며 황국신민의 ‘상징’ 같은 조선신궁의 초입과 맞물린다.

일본대사관은 12일 서울 중구 밀레니엄힐튼호텔에서 자위대 창설 기념 행사를 열었다. 일본대사관은 자위대 해외 파병 등으로 국내 반대 여론이 거셌던 2014년과 2015년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서울 대형 호텔에서 이 행사를 치러왔다.

밀레니엄힐튼호텔이 위치한 곳은 서울 중구 소월로 50. 숭례문에서 남산 방향으로 난 소월로를 따라 올라가다 보면 오른편에 위치해 있다. 남산을 바라보고 있는 힐튼 호텔의 정면은 일제 당시 조선신궁이 있던 자리다.

▲ 조선신궁 입구로 계단 초입에 세워진 조형물이 신사 입구를 표시하는 도리이다. 


1920년 5월 신사 건립 기공식 이후 5년에 걸쳐 건립된 조선신궁은 공사비만 156만4852엔에 달할 정도로 대공사였다. 신사 총면적은 12만7900여평으로 조선총독부 부지의 4배가 넘는 규모였다. 일제는 이 조선신궁을 건설하기 위해 한양도성 성곽 일부를 훼손했다.

이렇게 지어진 조선신궁은 일제강점기 내내 조선총독부와 함께 일제 통치의 ‘상징’으로 사용됐다. 조선총독부는 식민지 조선의 행정을 총괄하며 일본과 조선을 일체화하려고 했던 곳이라면 조선신궁은 일본제국주의 ‘정신’을 주입했던 곳으로 눈에 보이지 않는 ‘내선일체’ 역할을 수행했다.

신궁은 일반 신사 중에서 가장 격이 높은 곳으로 조선신궁에는 일본 건국신화에 등장하는 아마테라스 오오미카미와 조선을 침략했던 메이지천황을 모셨다. 류보선·염복규 씨 등이 함께 쓴 책 ‘서울의 인문학:도시를 읽는 12가지 시선’에 따르면 “아마테라스와 메이지천황은 일본 식민주의의 대원칙인 동화정책의 핵심적인 상징”이라고 주장했다.

‘서울의~’는 일본 시조신 아마테라스의 동생 스사노오미코토가 일본에서 쫓겨나 간 곳이 한반도 남부고 한국의 건국신화에 등장하는 단군이 바로 이 스사노오미코토라는 일제 식민사학자들의 가설이 깔려 있다고 소개하고 있다.

▲ 조선신궁 평면도. 빨간 원 안이 위부터 상광장 중광장 하광장이다. 

‘서울의~’는 “일본 시조신의 동생이 고대 한반도 지배자였기 때문에 원래 일본과 한국은 형제의 나라이며 한일병함은 마치 헤어졌던 형제가 만난 것처럼 자연스러운 일이라는 논리”라며 “헤어졌던 형제의 재회를 가능하게 한 한일합병 공로자가 메이지 천황이라는 논리가 나오는 것”이라고 해석했다.

특히 일본이 조선신궁을 남산에 세운 것도 조선의 역사를 부정하기 위한 작업의 일환이었다는 설도 있다. ‘묻혀 있는 한국 현대사’를 집필한 정운현씨는 책에서 “당시 남산 정상에는 목멱신사를 개칭한 국사당이 자리 잡고 있었다”며 “(일제는) 신사 건립에 앞서 1925년 7월 무렵에 남산 정상에 있던 국사당을 서대문 밖 인왕산 중턱으로 옮겼다. 일제는 조선혼을 쫓아내고 그 자리에 일본혼을 심을 작정이었다”고 적고 있다.

국사당은 태조 이성계가 조선을 세울 당시 도읍지로 한양을 추천했던 무학대사를 모신 사당으로 조선혼의 상징 같은 곳이었다는 설명도 덧붙였다.

조선신궁은 건립된 후 국가적인 행사를 도맡아서 치렀으며 일왕은 친히 조선신궁의 최고 책임자인 궁사를 임명했다. 국가적인 제사 등을 치르는 관폐대사급 신궁으로는 조선신궁이 유일했다.

▲ 조선신궁을 하늘에서 찍은 사진. 

조선총독부에 부임해온 총독이 제일 먼서 ‘신고’하듯 찾는 곳도 이 조선신궁이었고 일제가 징집한 학도병 등도 전쟁 전 들러 인사해야했던 곳이 이곳이었다. 일제 말기에는 학생을 동원해 신사 참배를 하게 강요했고 유일신 종교인 천주교회와 기독교회, 장로교회 등에도 신사 참배를 강요해 마찰을 빚기도 했다.

규장각한국학연구원이 펴낸 ‘조선 사람의 조선여행’은 “1940년대에는 전차가 조선신궁 앞을 지날 때 승차한 사람이 모두 신궁 쪽으로 깊숙이 (고개를) 숙여 목례를 해야했다”고 적고 있다.

현재 ‘남산공원’ 글자가 크게 자리 잡고 있는 힐튼호텔 앞 쪽 삼거리가 이 조선신궁 입구가 위치했던 곳이다. 여기에는 당시 신궁 입구를 상징하는 대형 조형물인 도리이가 있었다. 김구선생과 안중군 선생 동상이 세워진 곳을 거쳐 옛 식물원 자리(현재 분수대 위치)에 신궁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배전(참배객들이 절하는 장소)이 위치해 있었다.

일제는 말기 부여신궁을 건축할 계획을 세우지만 패망하면서 뜻을 이루지 못했고 결국 조선 반도에는 조선신궁 하나만 건설됐다. 조선신궁은 해방 후 가장 먼저 철거됐다.

이순우 민족문제연구소 연구원은 13일 미디어오늘과 통화에서 “힐튼호텔 입구는 옛 조선신궁 입구와 맞닿은 곳으로 식민통치 기구로는 조선총독부, 정신적인 통치로는 최고 높은 자리에 조선신궁이 있었다”며 “일본 대사관이 서울 시내 호텔을 찾던 중 우연히 밀레니엄힐튼호텔에서 행사를 하게 된 것으로 보여 그 이상의 의미를 두기에는 어려울 것”이라고 말했다.

참고도서: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조선 사람의 조선여행’

류보선 외, ‘서울의 인문학: 도시를 읽는 12가지 시선’

정운현, ‘묻혀 있는 한국현대사’

강준만, ‘한국근현대사 산책 8: 만주사변에서 신사참배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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