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량의 역설, 이순신 "천행, 백성이 날 구했다" 박근혜는?

2014. 8. 7. 1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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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칼럼] 박근혜 줄곧 인용하던 "신에게는 12척의 배가…" 세월호의 누구를 구했나

[미디어오늘 조현호 기자] 영화 < 명량 > 이 개봉 8일 만에 700만명을 돌파했다. 연일 신기록을 경신하고 있는 < 명량 > 이 대중의 마음을 사로잡은 배경이 뭘까.

영화배급사인 CJ가 영화관을 싹쓸이하고 있는 이유도 있다. 하지만 세계사적으로 찾아보기 힘든 역사적 승리였다는 '스토리' 자체도 무시할 수 없는 흥행돌풍 요인이다. 특히 세월호 참사 과정에서 보여준 정부와 정치권의 무능이 이순신의 리더십과 비교되면서 극적인 대비를 이룬 것도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인 것으로 보인다.

이순신은 사지(死地)와도 같은 조류에 휘말리며 12척(13척)의 배로 330여 척(난중일기엔 133척)의 왜군을 격파해 조선과 백성을 구했다. 반면 그로부터 417년이 흐른 2014년 박근혜 정부는 전 국민이 지켜보는 가운데 300여 명의 국민 중 단 한 명도 구하지 못했다.

영화 < 명량 > 은 그동안 알려졌던 기적적인 '대첩'이었다는 의미보다는 어떻게 13척으로 330여 척의 왜군을 물리쳤는지를 구체적으로 묘사했다.

경상우수사 배설이 위협적으로 이순신에게 대드는 장면, 아들 회와 대화하는 장면, 이순신이 탄 대장선을 포위한 왜적들이 도선(배에서 배로 뛰어넘는일)하려 할 때 지자총통으로 조란환을 일제히 발사해 살상하는 장면, 배 위에서 백병전을 벌일 때 쉽게 사람이 죽지 않는 장면 등은 상상력으로 재구성한 픽션으로 주목을 받았다. 그동안 명량대첩을 소재로 한 대하드라마('불멸의 이순신') 등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장면들이기도 하다.

영화 '명량'의 한 장면. 사진='명량' 예고편 캡처

이런 상상력을 동원한 장면들은 이순신이 전투를 마치고 돌아와 작성한 난중일기(정유일기-1597년)에서 착안한 것으로 보인다. 난중일기(정유일기-1597년) 음력 9월 16일자에는 이 전투을 가리켜 "이것은 참으로 천행(天幸)이다"라고 적혀 있다. 천행이란 하늘이 내린 행운을 뜻한다.

이 천행을 보여주는 장면은 영화 곳곳에 나타나 있다. < 명량 > 에는 이순신의 대장선에게 한참 두들겨 맞던 구루시마 미치후사의 대장선이 뱃머리에 이중으로 설치한 수십개의 창끝을 앞세워 이순신 대장선을 향해 전속력으로 돌진하는 장면이 나온다. 구루시마의 대장선이 이순신 대장선을 들이받으려 하는 순간 바로 앞에서 회오리가 일어나 구루시마 대장선의 배를 들어올려 가까스로 이순신의 대장선이 위기를 모면하는 순간은 극적인 '천행(天幸-하늘이 내린 행운)'이었다. 극적 효과를 내기 위해 가상으로 만들어낸 신(scene)으로 추정된다.

세월호 참사를 연상하게 하는 장면도 눈길을 끈다. < 명량 > 에선 적선에 둘러싸인 대장선이 고군분투해 여러 척을 부수고 나니 크게 파손된 이순신의 대장선 우현으로 침수가 일어나 침몰하는 장면이 나온다. 이 장면은 마치 세월호가 45도 기울어져있을 때를 연상케한다. 이 때 이순신과 휘하 장수들, 군졸들은 평안한 표정으로 죽음을 대비한다. 그러나 그 순간 돌연 수십개의 갈고리가 날아와 이순신 대장선을 걸어챈다. 민간어선들이었다. 이들 수척의 어선이 갈고리로 대장선을 걸어 쓰러져가던 대장선을 일으켜세웠다. '기적같은 천행'이었다. 역시 상상력의 한 장면이다.

이 같은 장면을 통해 감독이 보여주려 한 것은 뭘까. 이순신 특유의 백성을 사랑하는 마음을 강조한 것으로 보인다. 영화 끝 부분, 명량해전 전투가 끝난 뒤 들판을 거닐던 이순신(최민식)이 아들 회에게 전투의 승리를 천행이라 하자 아들 회는 전투 당시 돌진하던 적선이 대장선 앞에서 갑자기 회오리를 맞고 충돌을 피한 것을 예상했느냐고 물었다. 이순신은 이에 대한 답을 하지 않은 채 "백성이 날 구한 것이다"라고만 했다.

영화 명량의 한 장면. 사진=명량 예고편 캡처

영화 '명량'의 한 장면. 사진=명량 예고편 캡처

자신이 사지(死地)와 험준한 물살의 한 복판에서 고작 12척 함대로 330여 대선단을 분멸해 조선과 백성을 구해놓고 정작 백성이 자신을 구했다니. 이는 감독의 역설적이면서도 중의적인 표현을 담은 구절로 해석된다. 나라가 있어서 백성이 있는 것이 아니라 백성이 있으니 나라가 있으며, 충(忠)이라 함은 백성을 향한 것이어야 한다는 것을 말하고자 한 것으로 생각해볼 수 있다.

2014년 오늘의 모습은 어떨까. 안타깝게도 주요 요직을 맡고 있는 정부 관계자 가운데 이런 이순신의 충정을 가진 인사를 찾기가 어렵다. 명량해전이 있던 1597년 9월 16일로부터 517년이 흐른 2014년 4월 16일 진도 앞바다의 거친 맹골수로에서 죽어가는 300여 명의 국민을 박근혜 대통령을 비롯해 어떤 '장수'도 살리지 못했다.

박근혜 대통령은 6일 저녁 700만을 돌파한 영화 < 명량 > 을 관람했다고 청와대가 밝혔다. 민경욱 대변인은 이날 오후 브리핑에서 박 대통령이 과거 한나라당이 어려운 시절 '신에게 아직 12척의 배가 남아있다'(尙有十二隻)는 이순신 장군의 말씀을 인용했다고 전했다.

박 대통령은 실제로 10년 전인 2004년 3월 한나라당 대표로 선출됐을 때 "신에게는 아직도 12척의 배가 남아있다고 한 충무공의 비장한 각오로 이 자리에 섰다"고 연설을 한 적이 있고, 2년 전인 2012년 4월 5일 당명을 바꾼 뒤 "이순신 장군이 12척의 배로 나라를 구하셨듯이"라고 말했다.

12척의 배로 나라를 구한 이순신 장군을 들먹이던 박 대통령은 정작 대통령이 된 이후 수백명의 '백성' 목숨을 하나도 구하지 못했다. 박 대통령은 6일 영화 관람에 앞서 영화배우 안성기씨가 영화 흥행에 대해 설명하자 "무엇보다 스토리가 좋아야…" 한다고 말했다. 박근혜 대통령에게 정말 필요한 좋은 스토리는 무엇일까.

박근혜 대통령. 사진=청와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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