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진룡과 대통령의 남자들

2014. 7. 21. 1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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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당신은 문화부 직원의 '우상'이었던 유 전 장관을 쫓아내기 위해,

새누리당마저 반대하는 정성근을 임명하려 했던 것입니다

곽병찬 대기자가 박근혜 대통령에게 보내는 편지 67

2기 내각이 출범했다고 합니다. 사실상 해임당했다가 재기용된 정홍원 국무총리, 위장 전입, 부동산 투기, 논문 표절, 세금 탈루, 특혜 군 복무, 과도한 부수입 등 종합 비리백화점으로 지목됐던 정종섭 안전행정부 장관, 창조적인 부동산 투기와 농지법 위반으로 눈총을 샀던 최양희 미래창조과학부 장관 등이 이 내각의 새 면면입니다.

그런 이들에게 임명장을 주며 이렇게 당부했다더군요. "약도 먹다 끊으면 내성만 키워 시작하지 않은 것만 못하듯 '국가 적폐'도 완전 뿌리 뽑을 때까지 최선을 다해야 한다" "비정상의 정상화에 각 부처 장관들이 힘을 모아 달라." 이렇게도 강조했죠. "하루하루 역사를 만들고 우리 노력이 역사에 기록된다는 생각으로 최선을 다해 소임을 수행해 달라." 비정상과 적폐를 쌓아 오늘의 출세를 이룬 인물들만 골라 뽑았으니, '적폐와 비정상의 역사'를 새로 쓰자는 기대에 충분히 부응할 것 같습니다.

'어떻게 골라도 그런 사람만 고를까?'라는 지적은 귀가 따갑도록 들었습니다만, 이번엔 특별한 게 더 있었습니다. 프리미엄급 비리세트로 지목됐던 정성근 문화체육관광부 장관 후보자에 대한 임명을 강행하려던 것과, 그가 줄행랑치듯이 자진 사퇴한 다음 날 유진룡 문화부 장관을 사실상 해임시켰습니다. 문화부 직원들에게 '우리들의 우상'이었다는 유 장관을 쫓아내기 위해, 당신은 새누리당마저 반대하는 정씨를 억지로라도 임명하려 했던 것입니다. 이번 개각은 '세월호 참사'에 대한 책임을 묻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당신은 세월호 참사와는 무관한 사람을 쫓아내는 데 집중했을 뿐입니다.

누군가는 이번 개각 내용을 두고, '수첩 인사' 차원을 넘어 이젠 '가두리 양식장 인사' 차원으로 진화했다고 빈정댔습니다. 이젠 가두리 안에서 양식한 어류들만 골라 내각이나 청와대 등 주요 보직에 임명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비난의 강도가 세지긴 했지만, 사실 그것만으로는 부족한 것 같습니다. 가두리 안에서 길렀다 해도, 활어라면 물살을 거슬러 역동하는 본성을 갖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번 내각엔 그런 '활어'가 어디에도 없습니까. 모두 부동자세로 서 있다가, 호명하면 그제야 관등성명과 함께 '예, 알겠습니다'를 복창하는 허수아비들만 있어 보입니다.

게다가 반칙과 비정상, 불법과 적폐 등 오염물질에 찌든 물고기는 본시 배를 드러내고 입만 뻐금거릴 뿐입니다. 그 몸으로 어떻게 물살에 역류하겠습니까. 그나마 물살을 거슬러 더 맑고 깨끗한 미래로 나아가려던 거의 유일한 사람은 찍어냈으니, 언감생심 그런 마음을 낼 수도 없을 것입니다. 이를 통해 당신이 완성한 것은 허수아비 내각이었으며, 당신은 이 마을의 전능한 주술사로 절대 권위를 분명히 했습니다. 당신 뜻대로 정씨가 줄행랑만 안 쳤어도 금상첨화였겠지만, 지금 면면만으로도 모자람이 없습니다.

우리의 국무회의는 심의기관입니다. 그러나 정부의 중요 정책에 대해서는 대통령이 최종 결정하기 전 반드시 국무회의 의결을 거쳐야 합니다. 국정의 기본 계획, 정부 일반 정책, 중요 대외 정책, 헌법 개정안, 법률안, 대통령령안, 예산·결산안 등 의결이 필요한 것이 17종류나 됩니다. 국무회의는 국정의 주요 현안에 대한 토론의 장인 것입니다. 그런 자리에 허수아비들만 죽 세워져 있다고 생각해 보십시요. 양평이나 가평에 허수아비 마을이 있다는데 그와 다를 게 무얼까요.

유 장관이 전례 없는 방식으로 면직당한 이유는 이미 잘 알려진 것처럼 국무위원으로서, 혹은 장관으로서 허수아비 구실을 거부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국무회의에선 세월호 참사 직후 책임을 지고 내각이 총사퇴해야 한다고 개진했습니다. 대통령이 '그게 아니고~'라며 제지했다지만, 그는 의견을 거두지 않았습니다. 또 당신이 동의하지 않는 안을 피력하다가 역정을 사기도 했다죠. 문화부 장관으로서는 실·국장 인사를 청와대에서 찍어내리기 식으로 하려는 것에 반대했고, 예술의 전당, 관광공사, 생활체육회 등 산하 기관장을 청와대가 이른바 '캠프 출신'들로 채우려는 걸 거부했다고 합니다. 세월호 참사 후속 대책으로, 뜬금없이 '국민의식 개혁 시국강연회'를 주관하라는 청와대의 주문을 거절했다고 합니다. 그러니 그 꼴을 어떻게 눈 뜨고 보겠습니까. 죽은 척 하는 물고기만 골라 채워야 할 수족관에 어떻게 활어를 놔두겠습니까.

프란치스코 교황의 방한을 성사시키는 과정에서 몇 번의 고비를 넘기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한 사람이 유 장관이었습니다. 그런 사람을 내쫓았으니 교황청 쪽에서도 불편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교황이 8월14일 방한하는데, 인사청문회 등의 절차를 감안하면 자칫 영접 주무부서인 문화부의 장관도 없이 행사를 치르게 되었습니다.

당신이 수석비서관들로부터 대면보고를 받고 있다는 홍보성 보도가 2기 내각 출범 첫날 아침을 장식했습니다. 장관들로부터도 '일대 일 대면보고'를 받겠다고 했다고도 합니다. 하긴 세월호 참사가 벌어진 4월16일 그 긴박한 상황에서도 비서실장조차 대면보고 한번 못 한 사실이 공개됐으니 이젠 대면보고를 피하고 은둔하기도 힘들게 됐지요. 그걸 자랑처럼 홍보하고 있지만, 실은 전두환씨조차 재직 때 수석비서관만이 아니라 일반 비서관에게서도 대면보고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대면보고가 이루어진다고 한들 무슨 소용이겠습니까. 껄끄러운 말 한두 마디 했다가는 면직되는데, 그 앞에서 무슨 말을 할 수 있겠습니까. 게다가 입은 닫혀 있고, 받아쓰기나 하는 사람들로 채웠는데 말입니다.

갈수록 자폐적 증상이 심해지고, 기억력이 떨어지고, 감각 기능이 쇠약해지는 당신에게 시 한 수 권합니다. 잠시 독주를 멈추고 주변의 소리에 조용히 귀 기울여 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당신이 지나온 발길이 남긴 흔적들을 돌아보기 바랍니다. 박상천 시인의 '산길을 걷다가'입니다. 

"아무도 없는,/ 눈 덮인 산길을 바삐 걷다가/ 잠시 숨을 돌리려 바위에 앉았습니다.// 발자국 소리가 멈추자/ 주변이 갑자기 고요해지더니/ 산이 품고 있던 소리들이/ 조심스럽게 살아 납니다.// 내 발자국 소리에/ 숨죽이고 있던 산새 소리/ 나뭇잎들 바스락대는 소리/ 나무 위에 햇살 내리는 소리// 아, 거기 그 소리들이 있었습니다./ 내 발자국 소리에 묻혀/ 듣지 못하던 소리들이/ 거기에 있었습니다.// 발걸음을 멈춰야/ 들을 수 있는 산의 소리들// 숨죽이고 바위에 앉아/ 산의 소리를 들으며,// 내 발자국의 소란/ 내 발자국의 몰염치/ 내 발자국의 횡포를 깨닫습니다."

지난해 11월 국회에서 열린 '시 낭송의 밤'에서 유진룡 장관이 낭송한 시입니다.

곽병찬 대기자 chankb@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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