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의 콘크리트엔 금이 갔을까

2014. 6. 6. 21: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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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토요판] 뉴스분석 왜?

김부겸의 도전

▶ 대구에서 야당 정치인으로 산다는 것은 어떤 느낌일까요? 노무현은 서울 지역구를 놔두고 부산으로 내려가 낙선하면서 '바보 노무현'으로, 전국적인 정치인으로 거듭났습니다. 김부겸은 3선을 내리 하던 경기 군포시를 두고 대구로 내려갔습니다. 그리고 19대 총선과 이번 지방선거에서 모두 낙선했습니다. 하지만 '아름다운 패배'라는 칭찬이 쏟아집니다. 그는 어떻게 싸웠고 어떻게 패배했을까요.

4일 오후 6시. 출구조사 결과가 발표되자 김부겸 대구시장 후보의 선거사무소는 침묵에 빠졌다. 출구조사 결과는 55.6%(새누리당 권영진 후보) 대 41.5%. 김부겸 후보의 얼굴은 담담했지만 지지자들의 얼굴에는 아쉬움이 가득했다. 김부겸 후보는 방송 화면을 위해 개표방송을 좀더 지켜보다가 일어났다. 그리고 선거운동원들에게 악수하며 말했다. "힘냅시다. 미안해요."

역시 대구였다. 박근혜의 도시. 이번 지방선거도 박근혜 대 박근혜 구도로 치러졌다. 동대구역 인근 사거리에는 두가지의 시장 홍보 플래카드가 붙어 있었다. 새누리당 권영진 후보는 박근혜 대통령이 눈물 흘리는 사진과 함께 '박근혜 대통령 대구가 지켜야 합니다'라는 구호를 써 넣었고, 새정치민주연합 김부겸 후보는 박근혜 대통령과 함께 웃는 사진과 함께 '대통령과 협력하여 대구발전'이라는 구호를 써 넣었다. 하지만 권 후보는 대표적인 비박근혜, 친이명박 정치인으로 분류된다. 당내 경선에서 쟁쟁한 친박계 의원인 서상기, 조원진을 누르고 후보로 선출된 그는 대구와의 인연도 그리 깊지 않다. 경북 안동 출신인 그가 대구 청구고등학교에 다니던 3년 동안 하숙을 한 게 다다. 김부겸 후보는 말할 것도 없이 야당인 새정치연합의 후보다. 둘은 모두 박근혜를 전면에 내세웠다.

19대 총선 이어 시장 도전40.33%의 의미있는 득표"나라도 지역주의 도전해야지내가 맷집 있을 때 도전해야후배들도 이 길 따라오지 않겠나"논란 된 박정희컨벤션센터 공약"광장에 내놔야 토론 가능하다"꼬마민주당·통추·한나라당 거쳐새정치민주연합에 온 그의 꿈'전국정당'은 이뤄질 수 있나

박빙 또는 뒤집은 여론조사도 있었지만…

선거날 직접 느껴본 대구 밑바닥 민심은 심상치 않았다. 동대구역에서 탄 택시의 기사는 누구를 지지하느냐는 질문에 이렇게 대답했다. "인자는 좀 바꿔볼라꼬요." 동성로에서 만난 대구 시민들도 야당 후보인 김부겸에 대해 상당한 호의를 보였다. "사람은 괘안치(괜찮지)." 2번을 찍겠다는 사람은 생각보다 많았다. 김부겸 캠프를 취재하러 온 <대구방송>의 이종웅 기자는 "김부겸은 대구에서 지역정치인으로 완전히 자리를 잡았다. 박근혜를 내세운 선거운동은 '기이한 동행' 같지만 좋은 전략이다. 다만 대구의 완고한 벽을 넘을 수 있을지는 지켜봐야 한다"고 말했다. 김부겸 후보 쪽 이재관 공보팀장은 "저번 총선 때와는 또 다르다. 완전히 대구 시민들에게 김부겸 후보가 받아들여진 것 같다"고 말했다. "오늘 잘하면 역사의 현장을 보실 수 있을 깁니더."

결과는 기대에 못 미쳤다. 40.33% 득표. 2012년 총선에서 수성갑에 출마해 얻은 40.42%와 거의 비슷한 수치다. 아직도 '1번'의 위력은 대단했다. 여론조사 공표금지 기간에 한 여론조사에서는 박빙까지 따라잡거나 역전한 조사까지 있었지만 결국 숨은 표심은 1번으로 향했다. 길에서 만난 한 할머니에게 누구를 찍었느냐고 물었더니 의아하다는 표정과 함께 대답이 돌아왔다. "당연히 1번이지. 지켜야지."

그래도 40.33%의 의미는 만만치 않다. 구별 개표 결과를 보면 김 후보는 자신의 지역구라고 할 수 있는 수성구에서 47.49%의 표를 얻었다. 권영진 당선자는 49.93%로 거의 차이가 없다. 김 후보는 총선과 비교하면 7.1%포인트나 득표율이 높아졌다. 수성구는 대구에서도 젊은 인구의 비중이 높은 편이다. 대구 전역에서 40% 득표율을 넘긴 것만 해도 대단하다는 분석이 안팎에서 나온다. 대구지역의 새정치연합 지지율은 10% 중반대다. 김부겸이라는 '브랜드'가 대구 시민들에게 받아들여졌다는 것이다.

김부겸 후보는 아쉬워하면서도 희망을 갖는 모습이었다. "대구 사람들의 마음속에 억눌린 감정이 있다. 그걸 마음껏 표출할 수 있는 기회가 이번 선거였다. 하지만 결국 제대로 터뜨리지 못했다. 그것이 아쉽다." 대구 사람들은 언제나 1번이었다. 현재 여당인 새누리당한테는 '잡은 고기'인 셈이다. 굳이 혜택을 주고 굽신거리며 표를 달라고 애걸할 필요가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도리어 소외되고 있다는 섭섭한 감정이 대구 사람들의 마음속에 웅크리고 있다는 것이 김부겸 캠프 쪽의 설명이다. 최근 논란이 된 가덕도 신공항 문제가 대표적이다. 지난달 28일 부산 강서구 가덕도 신공항 후보지에서 새누리당은 중앙선거대책위원회 회의를 열었다. 야권 단일화 후보인 오거돈과 새누리당 서병수 당선자가 오차범위 내에서 치열한 득표전을 벌이던 부산에 신공항이라는 '선물'을 주겠다는 무언의 약속인 셈이다. 남부권 신공항 유치를 놓고 부산과 치열한 대결을 벌이고 있는 대구에는 아무런 메시지도 없었다. 대구 표심이 들끓을 만한 사건이었다.

야당 지지 두려움이 사라진 첫 선거

그는 선거 과정에서 대구가 많이 바뀐 것을 느꼈다고 했다. "2년 전 총선 때는 내가 2번이라는 이유로 내 명함을 받는 것도 남의 눈치를 보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같이 사진을 찍자는 사람도 많고 스스럼없이 친밀함을 표하는 사람도 많아졌다. 야당 후보를 좋아한다는 의사 표시를 하는 게 두렵지 않다는 이야기다. 대구에서 이런 선거는 처음이다." 그것이 모두 자기 덕분이라고는 말하지 않았다. "가슴에 잠재돼 있던 것이 표출될 만한 때가 됐다. 대선이 아니니까 부담도 적었고. 김모(부겸)가 이름값이 그래도 좀 있으니까 이 친구랑은 한번 해봐도 되지 않을까 하는 가능성을 보여준 것도 사실이다."

김부겸을 말하면서 이번에 그의 선거운동의 일등공신이라 할 수 있는 둘째딸, 탤런트 윤세인(본명 김지수)을 빼놓을 수 없다. 선거캠프 관계자들은 "김부겸 후보가 유세를 하는 20~30분 동안 세인이가 계속 '우리 아버지 김부겸의 대구 짝사랑을 받아주세요'라는 팻말을 번쩍 들고 서 있기도 했다. 남자들이라도 5분만 들고 있으면 팔이 아팠을 텐데… 선거기간 동안 가장 큰 힘이 됐다"고 말했다. 김 후보는 "자신에게 연예인의 길이 있어서 조심스러울 텐데도 스스로 와서 도와주는 게 너무 고맙다"고 말했다.

여전히 박근혜 대통령은 대구에서 건드릴 수 없는 '성역'이나 마찬가지다. 그래서 그의 '대박론'이 나왔다. 김 후보의 선거운동을 도운 홍의락 새정치연합 의원(비례대표)은 "박근혜 대통령이 대구에 지원을 하고 싶어도 자기 고향 챙기기라는 눈치가 보일 것 아니냐. 하지만 야당이 단체장을 하고 있으면 이런 점이 희석될 수 있다. 게다가 야당의 반대도 무마할 수 있고. 그래서 '박근혜 대통령, 김부겸 시장, 대구대박'이라는 구호가 나왔다"고 말했다.

김부겸이란 이름에는 물음표가 따라다닌다. '정치철새'로 오해받을 수도 있는 복잡한 이력 때문이다. 그는 1956년 경북 상주군 상주읍 오대리에서 태어나 대구중학교와 경북고등학교를 졸업했다. 1976년 서울대 정치학과에 입학해 유신반대를 시작으로 민주화운동에 투신했고, 2번 구속되면서 제적과 복학을 반복하다 1987년에야 학교를 졸업했다. 91년 꼬마민주당에 입당해 정식으로 정치생활을 시작했다. 꼬마민주당은 3당 합당에 반대하는 이기택, 박찬종, 홍사덕, 노무현 등이 세운 당이다. 김부겸은 1995년 이 당이 김대중 전 대통령이 정계복귀를 선언하며 만든 새정치국민회의에 흡수될 때 이를 거부한 멤버들이 결성한 국민통합추진회의(통추)에 합류했다. 그는 '통합과 상생'이라는 자신의 정치신념에 큰 영향을 준 사람으로 고 제정구 의원을 꼽고 있는데, 결국 그와 함께 한나라당에 입당한다. 통추는 1997년 대선 때 '선 정권교체'를 내걸고 국민회의에 합류한 노무현 전 대통령 등과 '3김 정치 청산'을 내건 제정구 의원 등으로 나뉘었다.

결국 한나라당 간판으로 2000년 경기도 군포에서 처음으로 국회의원에 당선됐다. 그는 한나라당 주류와 잘 어울리지 못했고, 2003년 대북송금특별법안에 유일하게 반대표를 던지며 '김부결'이라는 별명을 얻은 뒤 결국 탈당해 열린우리당 창당 때 합류한 '독수리 5형제' 중 한명이 된다.

한나라당에서는 대북관계 경색, 지역주의 등에 반대하다 '왕따'를 당했지만 민주당에서는 또 '영남·한나라당 출신'이라는 이유로 의심의 대상이 됐다. 그는 2010년 민주당 동료 의원들에게 보낸 자필 편지에서 "1997년 대선을 앞두고 이회창-조순 두 후보가 신한국당과 민주당의 합당을 결정했고 그에 따라 민주당에 남았던 이들은 저절로 한나라당 창당 멤버가 되어버린 것입니다… 제가 경북 상주 출신에 경북고를 나왔는데 기왕에 간 한나라당에서 웬만하면 적응했지 않았겠습니까? 그런데 버틸 수가 없었습니다. 제 정치적 소신이나 정책적 입장을 쉽게 포기할 수도 없었습니다… 한때의 그 이력이 오늘까지 이렇게 멍에가 되고 고비마다 족쇄가 될 줄은 몰랐습니다. 물론 이 모든 것 또한 제가 짊어지고 가야 할 짐일 것입니다"라고 썼다.

이런 이력은 이번 선거운동 방식과 맞물려 야당 지지자들에게 상당한 논란이 됐다. 김부겸 후보가 내세운 공약이 '박정희컨벤션센터 건립'이었기 때문이다. 김 후보도 논란이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고, 이미 예상했던 것이기도 했다. 그는 박정희컨벤션센터에 대해 이렇게 설명했다. "대구 사람들에게는 산업화에 대한 자부심, 박 전 대통령에 대한 고마움, 이런 게 정치적인 의식의 가장 근저에 있다. 이걸 자랑하고 드러내고 싶은데 그럴 만한 '광장'이 없다. 그러다 보니 점차 내면화되고 신앙 차원까지 가게 된다. 박정희라는 정치지도자에 대해 드러내 놓고 공적은 평가하고 과오는 비판할 수 있는 자신들만의 광장이 있어야 한다. 물 위로 올라와야 토론이 가능해지는 것 아니냐. 컨벤션센터는 그 광장의 개념이다. 광주에서는 김대중컨벤션센터가 지역민들의 삶에 밀접하게 연결돼 있고 일종의 에너지원이 된다. 전시도 하고, 공연도 하고, 집회도 하고, 결혼식까지 하지 않느냐. 대구 사람들이 그곳을 민주화의 결실로 인정하는 기회가 필요하다. 그래서 여기에는 박정희컨벤션센터를 열고 김대중센터와 교류를 하려고 했다. 자신들이 자부심을 느끼고 자랑할 공간이 생겨야 남들이 자랑하는 것에 대해서도 인정할 것 아니냐. 나는 그게 지역주의를 풀 수 있는 첫 단추라고 생각한다."

2년 뒤 대구 수성갑에서도 벽치기 유세?

이런 논란에도 도전의 의미가 퇴색되지는 않는다. 그는 내리 3선에 성공한 경기 군포를 떠나 19대 총선에서 대구로 내려갔다. 무소속이었던 유시민(18대 총선) 전 장관과 달리 야당 간판을 제대로 걸었다. 그리고 40%가 넘는 득표를 계속하고 있다. 그는 후원회원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대구에 처음 내려갔을 때 정말 막막했다. 명함을 돌리러 나가면 어떤 어르신은 '에이 민주당이네…' 그러면서 죽 찢어 바닥에 버렸다"고 했다. 주변에서는 무모한 도전이라고, 절대 안 된다고 말리는 사람들이 많다. 야당이 아니라 무소속으로 나오면 뽑아주겠다는 소리도 숱하게 들었다. 하지만 "대구로 온 것은 전국정당을 만들자, 지역주의를 깨자는 '통추' 선배들의 꿈을 이루기 위해서이기 때문에 야당 당적을 포기할 수 없다"고 말했다. "제정구, 노무현, 김원길, 원혜영 등의 선배들과 딱 20년 전 세웠던 통추, 그 막내로 내가 남았는데, 내 세대에서 적어도 이 문제에 대해 균열을 내지 않으면 앞으로 이걸 정치적 화두로 삼는 사람들은 없을 거다. 그런데 한국 사회에서 이는 꼭 풀어야 하는 문제다. 그나마 정치권에 있는 내가, 대구 사람인 내가 마지막으로 몸 바쳐보겠다는 거다. 나마저 이런 도전 안 하면 지역주의 문제는 아무도 깨지 못하는 현실이 돼버린다. 내가 아직까지 맷집이 있을 때 덤벼줘야 후배들도 이 길을 따라올 것 아니겠나."

그는 이미 '콘크리트' 같은 대구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고 믿는다. "사회는 한꺼번에 바뀌지 않고 조금씩 조금씩 균열이 가는 것"이라며 "이번에 무소속을 포함해서 대구에서 야권으로 분류되는 기초의원이 20명 이상 당선됐다. 주민들이 견제와 균형의 효과를 실제로 몸으로 깨닫기 시작하면 많은 변화가 있을 것"이라고 기대했다.

그는 "이리 된 이상 계속 도전해야 되지 않겠느냐"고 말했다. 2년 뒤 열리는 20대 총선에서 대구 수성갑 지역을 누비며 특유의 '벽치기 유세'를 하는 김부겸을 다시 볼 수 있을 것이다. 청중이 아무도 없어도 아파트 벽을 보고 유세를 한다고 해서 벽치기 유세다. 과연 김부겸의 도전은 성공할 수 있을까. 대구는 변할 준비가 됐을까.

대구/이형섭 기자 suble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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