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드롬·신화화 이후 '유사 박정희' 경계를

박송이 기자 2013. 11. 2. 10: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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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수는 '민족중흥의 기수'로 박정희를 끊임없이 불러낸다. 외환위기 때는 '신드롬'이라고 할 만큼 호출해 잘 써먹었다. 그 이후 박정희 신화가 파시스트 이데올로기로 비판받고, 보수정권이 경제적으로도 실패하면서 '박정희 약발'은 예전같지 않다. 그러나…

초혼은 죽은 사람의 이름을 세 번 부름으로써 그 사람을 소생하게 하려는 전통적인 의식이다. 지난 10월 26일 현충원에서는 박정희 대통령을 소생하게 하려는 애절한 초혼가가 울려펴졌다. 손병두 박정희대통령기념재단 이사장이 먼저 나섰다. 손 이사장은 "아직도 5·16과 유신을 폄훼하는 소리에 각하의 심기가 조금은 불편할 것으로 생각하지만 마음에 두지 마십시오. 태산 같은 각하의 뜻을 어찌 알겠습니까"라고 말했다. 이에 질세라 새누리당 심학봉 의원은 추도사에서 "아버지 대통령 각하"라고 말한 뒤 "아버지가 돌아가신 지 34년이 됐다. 아버지의 딸이 이 나라 대통령이 됐다"고 말했다. 김관용 경북도지사는 "박 전 대통령이 구국의 결단을 할 때 나는 교사여서 잘 몰랐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참 대단한 어른이란 생각이 든다"고 말하며 새삼스런 감격을 전했다.

지난해 당시 새누리당 비대위원장이었던 박근혜 대통령이 서울시 마포구 상암동에 개관한 박정희 대통령 기념.도서관을 관람하고 있다./김영민 기자그러나 이들의 초혼가는 울리지 않는 변방의 북소리에 그치고 있다. 애타게 박정희 전 대통령을 불러보지만, 박 전 대통령이 다시 소생할 기미는 없어 보인다. 떠들썩하게 10·26 추도식을 거행하고, 정부가 나서서 새마을운동을 복원하겠다고 하지만 일부 보수층을 제외하고는 별로 관심이 없다. 오히려 박 전 대통령을 복원하려는 이러한 보수진영의 움직임이 현 정부에는 마이너스로 작용할 것이라는 분석이다.

호출할수록 박근혜 정부 무능 드러내

이택광 경희대 영미문화학과 교수는 보수진영 일각에서 박정희를 자꾸 호출하는 것을 박근혜 정부가 경계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 교수는 "박 전 대통령을 다시 호명하는 것은 이 정부에 도움이 안 된다. 자꾸 이 정부가 우상숭배로 귀결된다는 것은 그만큼 이 정부의 지향점이 없다는 것을 보여준다"며 "뚜렷하게 뭘 하겠다는 의지 없이, 그저 새마을운동을 하겠다는 것으로밖에 보이지 않는다"고 말했다. 박정희를 애타게 찾는 보수진영 일각의 움직임은 '박정희 향수' 외에 다른 것으로는 지지를 끌어모을 수 없는 박근혜 정부의 무능을 역으로 보여준다는 분석이다.

역대 대통령 호감도 조사에서도 박 전 대통령은 예전만큼 힘을 쓰지 못하고 있다. 박 전 대통령은 줄곧 부동의 1위를 차지해 왔고, 대부분이 압도적 1위였다. 그러나 이러한 기류는 2000년대 중·후반에 들어서면서 조금씩 달라진다. 박 전 대통령은 여전히 역대 대통령 호감도 조사에서 1위를 차지하는 경우가 많은 편이지만, 최근 복수의 여론조사에서는 노무현 전 대통령이 박정희 전 대통령을 앞지르기도 했다. 2012년 5월 동아시아연구원이 발표한 역대 대통령 평가에서도 노무현 전 대통령에 대한 호감도가 박정희 전 대통령에 대한 호감도를 앞질렀다. 노무현 전 대통령 호감도는 67.4%, 박정희 전 대통령 호감도는 65.5%였다. 대통령의 상징처럼 여겨졌던 고유명사 '박정희'가 한국 사회에서 더 이상 예전만큼 영향력을 발휘하지 못한다는 것을 방증하는 지표다.

불과 10여년 전인 1990년대 후반에서 200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분위기는 달랐다. 박정희에 대한 대중들의 지지는 절대적이었고 전폭적이었다. 가히 '박정희 신드롬'이라고 불릴 정도였다. 특히 1997년 IMF 외환위기를 기점으로 경제위기를 타개할 카리스마적 지도자를 찾는 대중들의 요구는 박정희 전 대통령에 대한 집단적 향수로 수렴됐다. 그러나 박정희 신화가 파시스트적 접근으로 비판되고, 보수정권이 경제적으로 실패한 사례가 늘어나면서 보수진영이 내건 '민족중흥의 기수 박정희' 프레임도 점점 대중들에게 설득력을 얻지 못하고 있다.

민주화 이후 보수세력을 중심으로 끊임없이 박정희 신화를 만들어내려는 움직임이 있어 왔다. 당시 사회를 휩쓸었던 박정희 전 대통령에 대한 호의적인 평가나 신드롬은 단지 향수나 복고주의에 그치는 문화적 현상은 아니었다. 강준만 전북대 교수는 1990년대 '박정희 신드롬'은 문화적인 현상이 아니라 정치·경제적인 현상이라고 분석했다. 강 교수는 1998년 발간된 < 인물과 사상 > 2권에서 "우리 사회에서 권력과 금력을 가진 기득권층, 그리고 엘리트층의 절대다수는 박정희 시대에 영화를 누렸던 사람이다. 그들은 우리 사회의 언로를 장악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러한 분위기는 IMF 경제위기의 흐름을 타고 강한 카리스마를 지닌 지도자를 찾는 대중들을 사로잡았다. 당시 < 중앙일보 > 에서는 박정희 대통령의 비서실장을 지낸 김정렴씨의 회고록이 연재됐고, 조갑제 전 월간조선 대표의 < 내 무덤에 침을 뱉어라 > , 소설가 이인화의 < 인간의 길 > 등 '영웅 박정희'의 모습을 그린 소설들이 연달아 출간됐다.

2011년 당시 한나라당 박근혜 의원이었던 박근혜 대통령이 새마을운동 성역화사업 준공식에 참석, 박정희 전 대통령 동상을 만져보고 있다./연합뉴스 신드롬 사라지고 신화화 설득력 잃어

이러한 박정희 신화화 작업은 '파시스트 이데올로기'라는 비판을 받는다. 이러한 비판작업은 기존에 박정희를 신화화하려는 이들의 대중적 설득력을 약화시키고 발언권을 축소시키는 효과를 낳았다. 당시 '박정희 신드롬'에 직격탄을 날린 대표적인 인물은 강준만 전북대 교수다. 그는 < 인물과 사상 > 2권에서 '왜 박정희 유령이 떠도는가'라는 제목의 글을 발표하며 당시 베스트셀러 작가였던 이인화의 '인간의 길'을 공개적으로 비판한다. 이 소설은 박정희의 일대기를 영웅화한 내용을 담고 있다. 이씨는 당시 "희망을 잃고 총체적 허무주의에 빠져 있는 내 또래 젊은 세대에게 국가 발전의 방향을 제시하기 위해서" 소설을 썼다고 밝혔다. 강 교수는 대구 출신인 이씨의 지역주의적 뿌리를 비판하며 "개발독재로 인해 탄압받은 사람들이 두 눈을 시퍼렇게 뜨고 살아 있는데 독재자를 예찬하는 것은 극단적인 파시스트도 감히 공개적으로 꺼리는 말임을 알아야 한다"고 일갈한다. 이씨가 말하는 '인간의 길'은 '인간의 길'이 아니라 '파시스트의 길'이라는 비판이었다.

조갑제 전 월간조선 대표의 < 내 무덤에 침을 뱉어라 > 도 박정희를 영웅화한 전기였다. 진중권 동양대 교수는 책의 제목을 그대로 비꼰 < 네 무덤에 침을 뱉으마 > 로 조 대표의 박정희 신화화 작업을 비판했다. 진중권 동양대 교수 또한 이 책에서 '박정희 철학'이 일제 군국주의 파시스트 이데올로기의 복사판임을 지적하며 파시스트들의 '신화 만들기'를 비판한다. 고 전인권 교수의 < 박정희 평전 > 또한 독재자 혹은 영웅 박정희를 넘어서 개인으로서의 박정희를 해부했다는 데서 탁월한 작품으로 평가받는다. 전인권 교수의 < 박정희 평전 > 은 박정희를 독재자나 영웅 식의 이분법으로 다루는 기존의 구도를 벗어나 한 개인으로서 박정희의 심리를 분석한다. 박정희의 심리적 고아의식, 가난 체험과 같은 정신적 트라우마, 가족 환경 등을 연대기별로 분석하는 등 개인 박정희를 들여다보면서 자연스럽게 박정희를 신화화하려는 움직임에 거리를 두는 효과를 낳았다.

노무현 정부 이후 재등장한 보수정권과 이들의 경제적 실패도 '박정희 신드롬'을 해체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한다. 보수진영은 경제적 어려움을 민주정부의 무능으로 비판하며, 경제부흥의 기수로 끊임없이 박정희를 호출해 왔다. 이명박 전 대통령은 박정희의 '산업화 패러다임'을 등에 업고 박정희 향수를 자극하면서 유권자들의 지지를 받은 대표적 인물이다. 하지만 '산업화 패러다임'의 상징처럼 여겨졌던 '4대강 사업'은 건설업자들의 배만 채운 채 여론의 지탄을 받기에 이른다. 자연스럽게 더 이상 '박정희 식의 경제부흥'이 시대적으로 유효하지 않다는 것을 국민들이 체감하게 된 것이다. 노정태 자유기고가는 "IMF가 터지면서 박정희 시대의 표상을 경제적 상황에 갖다 쓸 만큼 썼다. 이젠 더 이상 국민들에게 설득력 있게 다가가지 않는다"면서 "특히 이 전 대통령이 4대강 사업 등을 하면서 박정희 식의 표상은 효과가 없다는 것을 (국민들이) 학습했다"고 말했다.

문제는 '언제든 박정희 불러낼 분위기'

하지만 '박정희 신드롬'이 사라지고, '박정희 신화'가 설득력을 잃었다고 하더라도 한국 사회의 보수화·우경화 위험성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지금 박정희에 대한 일부 보수진영의 호출은 일종의 충성경쟁, '생계형 호출'인 경우가 많다. 한윤형 정치평론가는 "박정희 전 대통령에 대한 대중의 평가가 거의 끝난 상황에서 박정희가 호출되고 있는 것은 현재 대통령인 박근혜 대통령에게 아부하기 위한 권력지향적인 속성이 강하다"고 말했다. 그런 지점에서 진보·개혁진영에서 박근혜 정부를 박정희와의 연장선상에서 '유신' '권위주의' '민주주의 위기'로만 비판하는 것은 보수의 가장 후진적인 층위와 싸우는 것에 불과할 수 있다. 문제는 일부 보수진영의 '박정희 신화화'가 아니라 유사 박정희를 언제든 호출할 수 있는 사회적 분위기가 우리 사회 저변에 깔려 있다는 것이다.

노정태 자유기고가는 "여전히 극우적 해법들이 계속 시도되고 그게 먹혀들어갈 수 있는 사회적 분위기"라면서 "극우세력이 이승만을 띄우고 박정희를 띄우려고 하지만 현재는 잘 안 된다. 그러나 문제는 새로운 카리스마적 리더십을 갖춘 지도자가 나오게 된다면 대중들은 언제든 따라갈 준비가 되어 있다는 것"이라고 말했다. 진중권 전 동양대 교수는 지난 6월에 출간한 < 네 무덤에 침을 뱉으마 > 개정판 서문에서 "사실 이 책은 오래 전에 폐기됐어야 한다"며 15년 만에 개정판을 쓰는 소회를 밝힌다. 이 책의 생명력이 지속되는 것은 1998년 박정희 신드롬이 몰고 왔던 '극우 멘털리티'가 존속하는 비정상적인 상황이 지금도 지속되고 있다는 방증이라는 씁쓸한 진단이다. '일베'와 같은 새로운 우익의 등장 역시 같은 맥락이다. 박권일 칼럼니스트는 "일베나 반이주노동 커뮤니티 등에서는 문제를 일소해줄 수 있는 지도자들, 예를 들어 일본의 하시모토나 이런 사람들처럼 강력한 지도자가 나타나서 외국인 노동자를 쓸어내기를 바라는 흐름들이 있다"고 말했다. 현재 보여지는 보수화·우경화의 흐름은 '박정희'로 대변되는 기존 보수층에 대한 일방적 추종이 아니라 카리스마적 지도자를 바라는 새로운 흐름으로 나타나고 있다는 것이다. 역대 대통령 중의 한 명인 고유명사로서의 '박정희'는 더 이상 설득력이 없어도 '카리스마적 지도자'로 상징되는 보통명사로서의 '박정희'는 언제든 살아 돌아올 수 있는 사회적 분위기가 형성돼 있다는 것이다. IMF 외환위기를 둘러싸고 신드롬처럼 번져나갔던 '박정희 신화'는 더 이상 나타나고 있지 않지만, '박정희 신화' 그 이후의 모습 또한 낙관적으로만 그려지지 않는 이유다.

< 박송이 기자 psy@kyunghyang.co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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