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 잘못쓰면 나한테 맞는다?
[손석춘 칼럼] 새누리당 연찬회 김무성 만취 추태는 '한국 언론의 치명상'이다
[미디어오늘 손석춘 언론인·건국대 교수] 이형. 이 가을을 어떻게 보내시나요. 저는 갈수록 세상과 불화가 커져 쓸쓸함이 깊어가고 있습니다. 삶의 '연륜'이 쌓일수록 이해심이 넓어지는 게 자연스러운 흐름이겠지요. 그런데 저만 그런 걸까요? 도통 이해할 수 없는 사건들이 무장 늘어납니다.
며칠 전에 본 미디어오늘의 단독보도는 지금도 가슴까지 싸하게 합니다. 보도에 따르면, 새누리당 국회의원 김무성이 우리 후배 기자를 성추행했더군요. 새누리당 연찬회가 끝난 뒤에 가진 기자들과의 술자리에서 김무성은 한 여기자의 허벅지를 짚었고, 또 한 여기자를 무릎에 앉히려 했습니다.
그런데 이형. 왜 그 사건이 일어난 뒤 한 달이 지나서야 공론화 되었을까요? 그리고 왜 하루 지나서는 공론화가 묻혔을까요? 미디어오늘이 보도했는데도 그 사건을 아예 보도하지 않거나 침묵만 하더군요.
김무성의 언행과 기자들의 언행
피해를 입은 기자는 "김 의원이 사과 요구를 받고 직접 구두로 사과했다"면서 "공식적인 차원에서 기사화도 논의했지만 2차 피해도 있어서 사과를 받는 선에서 넘어갔다"고 말했답니다. 이 또한 저의 상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습니다. 대체 어떤 게 '2차 피해'일까요? 그 사실을 보도하는 것이 기자에게 과연 그렇게 큰 '피해'를 주는 건가요? 더구나 김무성 쪽은 '공식 사과' 요구를 받지도 않았고 사과하지도 않았다고 주장했더군요.
좋습니다. 자신이 받은 성추행을 개인적인 '2차 피해'를 우려해서 덮었다고 합시다. 정작 제가 더 이해할 수 없는 일은 그날 있었던 김무성의 언행, 아니 그 언행을 지켜본 젊은 기자들의 언행입니다.
김무성은 참석한 기자들에게 한명 씩 한명 씩 돌아가며 물었답니다.
"니는 어디 소속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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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무성 새누리당 의원©연합뉴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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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 한 기자가 자신이 속한 언론사 이름을 말하자 "기사 잘 써야 돼. 기사 엉터리로 쓰면 나한테 두드려 맞는다"고 했다는 군요.
이형. 어떤가요. 저는 그 대목을 읽는 순간 울뚝밸이 치밀었습니다. 몇 번을 다시 읽었는지 모릅니다. 믿어지지 않아서이지요.
대체 이게 어인 일인가요. 어떻게 일개 국회의원 따위가 모든 언론사 기자들을 상대로 돌아가며 "니는 어디 소속인고?"라고 물을 수 있는가요.
'일개 국회의원'이 아니라 '새누리당 실세'라 그렇다? 만일 우리 후배기자들이 그렇게 생각했다면 그건 더 큰 문제입니다.
무릇 기자는 권력에 강하고 사회적 약자에 겸손해야 마땅하니까요. 김무성은 일개 국회의원이 아니라는 말, 옳지요. 촛불광장의 민주시민들로부터 지탄받고 있는 정치인입니다. 기자에겐 그의 일상을 '감시'할 기본 책무가 있습니다.
새누리당을 출입하는 기자 개개인은 자신이 속한 언론사를 대표합니다. 그런데 "니는 어디 소속인고?"라고 묻는 안하무인 작태에 기자들이 소속을 밝히는 게 이해됩니까?
더구나 엉터리로 쓰면 나한테 두드려 맞는다?
이형. 우리가 젊은 시절이었어도 그 따위 수작 앞에 침묵했을까요? 아무리 기사를 읽어도 그 자리에서 정색을 하고 맞받아친 기자가 없다는 게 참담합니다. 찾아보니 기사조차 한 줄 쓰지 않았더군요.
저를 더 비참하게 만든 건 역설이지만 청와대 국정기획수석 유민봉입니다. 그는 김무성에게 "기자들한테 '야 이놈들아' 이게 통한다는 게 저는 너무 이상하다"고 말했다지요. 김무성은 "다 아들 딸들인데"라고 답하며 계속 그 작태를 보였답니다.
이형. 과연 이래도 되는 건가요? 우리 후배들이 권력 앞엔 너그럽고 사회적 약자 앞엔 까칠한 사람들로 커나가는 것은 혹 아닌가요?
늘 편지에서 강조했지만 대체 이게 보수니 진보니 매체의 색깔을 따질 문제인가요? 기자윤리의 기본 문제 아닌가요. 취재원과 기자 사이에는 '적정한 거리'가 필요하다는 저널리즘의 상식조차 잊힌 걸까요.
기자 개인 아닌 '한국 언론의 치명상'
저는 젊은 기자들의 무뎌진 '필봉'은 그들의 선배들인 '이형들'의 '붓끝'과 이어져 있다는 생각이 자꾸 듭니다. '권력 감시'라는 주어진 임무는 뒷전이고 매체의 색깔을 위해 글을 써대는 고위 언론인들을 김무성은 어떻게 보았을까요? 유민봉은 정치인들에게 "야 이놈들아" 소리를 듣는 기자들을 앞으로도 '이상하다'고 생각할까요?
더구나 자기 자리를 향유하는 데 안주하거나 급급한 고위 '간부'들의 권력의식은 '매체 색깔'의 차이를 넘어 언론계에 보편화하고 있는 징후마저 보입니다. 자기 이해관계에만 예민한 인간들로 언론계가 차고 넘칠 때, 언론은 물론 겨레의 내일이 어떻게 될까요.
그래서입니다. 젊은 기자들에게 권합니다. 자기도 모르게 기자의 기개를 잃어가는 것은 아닌지 성찰이 필요하지 않을까요. 여성 동료 기자가 성추행 당해도, 민주시민들로부터 '반민주적 정객'으로 지탄받는 정치인이 허튼 수작을 내놓고 해도 젊은 기자들이 죄다 침묵했다면, 그것은 기자 개개인의 '상처'가 아닙니다. 한국 언론의 '치명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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